한국하늘의 공중전
This document was updated at 2005. 7. 5
우리에게는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기억되고 있는 한국전쟁은 2차대전이 끝난후 최초로 벌어진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의 대결이었다. 그당시 우리의 하늘에서는 미국과 소련의 최첨단 전투기들이 한치의 양보도 없이 대치하고 있었으며, 항공전사의 측면에서는 왕복엔진의 시대를 마감하고 제트기들의 전성시대를 활짝 열어 내기도 했다. 한국전쟁을 통해서 나타난 새로운 공중전의 뒷 이야기들을 당시 참전 조종사들의 생생한 회고담과 공중전 비화를 통해 살펴 보기로 하자.
- 공군대위 빌 빌리의 회고록 -
* 잊을수 없는 김포 K-14 비행장
내가 처음 한국에 도착한 것은 사관학교를 졸업한지 7년후인 1952년 6월 5일이었고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김포비행장 제4 방공비행단 제 334비행대대로 배속되었다. 그때 나는 1800시간의 전투기 비행시간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 100시간은 제트기종 전환과정이었고, 40시간은 최신 전투기 F-86의 훈련비행 시간이었다.
나는 5년전인 1947년에 제8전투비행단 소속으로 38도선의 초계비행임무를 수행했던 적이 있었기에 김포와 한국은 내게 친근한 곳이었다. 이무렵 우리 극동공군은 이 임무를 일본에 주둔한 전투비행단들에게 교대로 부여했으며 한국내에는 언제든지 4대의 미군전투기들만이 주둔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때 우리의 임무는 38도선을 따라 날면서 북한 내 비행장의 항공기 세력을 정찰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정찰비행을 실시할 때마다 그 당시 북한의 항공기들은 우리가 믿지 못할정도로 늘어나고 있었다. 해주의 한 비행장은 200대 이상의 항공기가 주기되어 비행장 전역을 덮고 있어서 항공기 이착륙에 필요한 최소한의 공간마저 남아 있지 않았을 정도였다. 사실 이런 것들을 목격한 후에도 전쟁이 발발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지만 뒤돌아 생각해보니 아마도 이 항공기들이 바로 1950년의 전쟁 발발시 최초의 공습을 감행했던 항공기들의 일부였던 것 같다.
[ 전쟁이 끝난후 1년이 지난 1954년에 촬영된 김포비행장 ]
1952년의 김포는 내가 있었던 1947년과는 너무나 많이 달라져 있었다. 예전에는 매우 조용하고 평화롭고, 약간의 변화도 금방 느낄 수 있는 곳이었지만..지금은 항공기들이 하늘과 유도로, 엄폐호, 주기장을 가득 메우며 오가고 있었다. 기종도 다양해서 F-86에서부터 호주 공군의 사진 정찰기인 미티어 비행기까지 있었다. 김포는 전선에서 가장 가까운 비행장이었기 때문에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던 여러종류의 항공기들이 연료부족이나 기체손상등의 이유로 착륙하곤 했다. 그 항공기들 사이에서도 작전 사령부건물은 1950년의 상처를 자랑스럽게 간직한채로 남아있었고 회색빛의 숨막힐듯한 먼지는 오히려 더 늘어난 것 같았다. 이무렵 한국의 날씨는 덮고 습하고 끈끈했으며 잠깐의 소나기만이 약간의 신선함을 가져다 줄 뿐이었다.
이런 모든 문제들은 다시 F-86을 조종하고 MIG 15와 대결할 기회를 가진다는 사실만으로 깨끗이 잊혀질 수 있었다. 일주일 뒤 다섯차례의 지역적응 훈련비행을 끝낸뒤 나는 사진 정찰 임무를 띤 해병대의 밴쉬편대를 호위하는 4대의 F-86편대의 4번기로 압록강위를 날 수있었다. 작전은 1시간 30분동안 지속되었는데, 그동안 우리는 단 한대의 미그기도 보지 못했지만 그 비행이야말로 내 생애에 있어 가장 긴장된 비행이었다.
1951년 여름부터 전쟁은 38선 부근에서 교착되기 시작하였다. 우리의 작전구역은 K-14 비행장에서부터 북한과 중국의 경계인 압록강 북쪽 200마일까지였다. 우리는 주로 서쪽의 해안선을 따라 작전을 벌였는데 때로는 반도의 중부지역이나 최북단지역까지도 나아가곤 했지만 동해안 쪽으로 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가장 활동이 활발한 미그기의 기지는 압록강 하구의 만주 쪽에 있었다.
* 2기 단위인 우리의 공중전술
우리의 기본적인 편대대형은 4기로 이루어진 핑거팁 편대였다. 우리는 4기로 이루어진 편대를 한임무에 여러 편대 투입하는 일은 있었지만 이들 편대가 완전히 한꺼번에 뭉쳐서 비행하는 일은 드물었다. 전쟁초기에는 미그기나 세이버기 모두 엄청난 대편대를 동원하곤 했지만 그런 대편대는 오히려 작전에 거추장스럽고 유연성을 감소시켰다. 그러나 4기 편대의 경우에는 전투시에는 2기씩의 소편대로 나뉘어져 선도기가 사격을 하고 2번기가 엄호를 맡았다. 엄호를 맡은 윙맨은 알려지지 않는 진정한 영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윙맨의 임무는 위험할 뿐만 아니라 최고의 기량과 훈련을 요하기 때문이다.
[ 압록강을 향해 비행중인 제336 전투요격기대대 소속의 F-86F 전투기의 2기 편대 ]
한국의 하늘에서 최초로 제트기 시대의 공중전이 도래함에 따라 우리는 조종사 혼자서 목표물을 추적, 사격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안전을 확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게 되었다. 제트기 시대에서는 모든 것이 너무 빨리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그에 따라서 공중전의 방법도 다음과 같이 변화할 수 밖에 없었다. 편대장기가 목표를 발견하게 되면 그는 일단 '패드록' 이라고 외친다. (원래는 I'm padlocked! 이며 목표기에 집중해서 다른 상황은 신경쓸수 없으므로 윙맨에게 엄호를 요청한다는 말이다.)
이 말은 장기의 조종사가 목표의 추적과 조준에 신경을 집중하게 되므로 편대의 후미 안전을 윙맨이 확보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말을 들으면 윙맨은 즉시 사방을 살펴본 후에 안전함을 확인하고 상태 양호라고 답한다. 이후 장기는 다시 한번 패드록을 반복한다. 그 후 윙맨은 편대의 후방이 안전한지 확인하려고 계속 고개를 좌우로 돌리면서 몇 초마다 '상태 양호!'를 반복하여 장기의 불안을 덜어주게 된다. 장기가 아무리 격렬한 기동 (급선회, 나선 강하, 하프 루프)을 실시하는 중에라도 윙맨은 장기의 뒤를 따라 편대를 유지해야하며 이 와중에도 후방을 살펴야한다.
나도 언젠가 한번 나의 패드록 신호에 윙맨으로부터의 응답이 없는 바람에 거의 다 잡았던 적기를 놓친 적이 있었다. 그 때 내 윙맨은 자기위치에 붙어 있었지만 너무 흥분한 나머지 내 신호를 듣지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윙맨으로부터 대답이 없으면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며 윙맨이 격추되었다는 생각에 뒤를 돌아보며 윙맨의 존재를 확인해 보게 된다. 잠깐 뒤돌아보면서 윙맨이 무사함에 안도하며 다시 앞을 보았지만, 어느새 앞에 있던 적기가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믿기 힘들지만 이건 엄연한 사실이었다. 이것은 천분의 일초밖에 안되는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지는 일이다.
[ 한국의 겨울하늘을 배경으로 이륙중인 2기의 세이버 편대 ]
적기 출연 예상 지역에서는 반드시 2기의 소편대 이상이 함께 행동해야 한다. 만약 어느 이유로든 장기와 윙맨이 함께 행동해야 한다. 만약 어떤 이유로든 장기와 윙맨이 서로를 놓치게 되면 둘 다 일단은 해안 쪽으로 비행하면서 재접촉을 시도해야한다. 다시 편대를 이룬 뒤에는 연료가 닿는 한까지는 작전 구역으로 재진입하여 머물러야한다. 만일 서로를 찾지 못하면 둘 다 즉시 기지로 돌아와야 한다. 이런 규칙들은 적어도 우리 비행대에서는 절대적으로 준수되어야 하는 규칙이었으며 다른 비행대보다 우리 비행대의 손실률이 낮았던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나는 전쟁중 동료 조종사 한명을 미그기에 의해서 잃은 적이 있는데 그 미그기는 고공편대에서 우리를 향해 급강하해서 미처 우리가 눈치채기 전에 우리 동료를 격추하고는 다시 상승해 버렸고 격추된 조종사는 전쟁이 끝난 후에 포로 수용소에서 구출되었다. 내 생각으로는 격추당하는 조종사의 대부분이 자신의 편대기와 떨어진 채로 적기의 추격에만 몰두하다가 자신의 후방안전을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따라서 모든 세이버 조종사들이 우리들의 규칙을 지켰다면 세이버의 손실 대수는 휠씬 적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 다양한 작전 형태
당시 우리는 전투기 소탕 (fighter sweep), 정찰기 엄호, 폭격기 엄호, 비상출격등의 주요 임무들을 모두 4기의 편대로 수행했다. 전투기 소탕작전의 경우에는 4기로 구성된 1개의 편대가 어떤 특정한 한 구역을 (대개는 압록강변)을 배정받아서 우리를 요격하려고 남하하는 미그기를 저지하기 위해서 초계활동을 벌이게 된다. 이 임무가 가장 잘 알려진 작전의 형태였고 또 조종사들이 가장 바라는 임무이기도 했다. 임무의 제약성이 가장 적고 또 대부분의 미그기 격추가 이 임무중에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정찰기의 호위임무는 좀 성격이 다르다. 이 임무는 그렇게 인기가 좋은 편이 아닌데 F-86보다 속력이 느린 RF-80이나 해병대의 밴쉬를 호위하는게 상당히 어렵기 때문이다. 사진 정찰기를 호위하기 위해서는 임무의 처음부터 끝까지 정찰기에 근접한 상태에서 속도가 느린 정찰기를 앞지르지 않기 위해서 갈짓자로 비행을 해야한다. 근접엄호를 맡은 편대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정찰기의 주변을 떠나서는 안된다. 근접엄호외에도 또다른 한편대가 중거리 엄호 (대개는 정찰기의 5000피트 상공)를 맡고 때로는 그 5000피트 상공에 고공엄호 편대가 배치되기도 한다.
일단 미그기가 발견되면 그들이 정찰기에 접근하기 전에 상공의 두 편대가 먼저 교전상태에 들어가게 되고 이 순간부터는 근접엄호 편대의 부담이 더 커지게 되는데 정찰기와 그 조종사들의 무사 귀환여부가 그들의 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특히 근접엄호 임무를 싫어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적기가 사방에서 거세게 밀려올때는 더 그랬다. 그렇지만 훈련의 효과가 좋았던지 우리는 단 한대의 정찰기도 잃지 않았다. 단 한대도 상처를 입지않고 귀환하긴 했지만 만일 한대라도 격추당했더라면 하고 생각을 하면 지금도 오싹해진다.
폭격기 호위 임무는 정찰기 엄호처럼 그렇게 제약이 많지 않다. 우리 전투기들은 대개 폭격기들이 목표를 공격하는 동안에는 상공에서 머물러 있으면서 그들을 지켜보다가 혹시라도 그들을 공격하러 접근하는 미그기들이 있는 경우에 대비하면 되는 것이다. 이 임무 중에는 우리는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폭격기 편대에 접근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매우 간단했다. 폭격기 사수들은 그들 편대에 접근하는 모든 전투기들에 대해서 일단 쏘고 보는 버릇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폭격기의 기총사수들은 미그기와 세이버 전투기의 식별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데다가 '아군을 쏘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은 자신의 기체를 보호하는게 우선이다.' 라는 것이 그들 세계의 진리요 명연이었다. 게다가 이 원칙에 의해서 미그기에 의한 폭격기의 피해가 상당히 감소했기 때문에 우리는 폭격기 사수를 비난할 수도 없었다. 결론적으로 폭격기 엄호 임무도 그런데로 괜찮은 임무였다.
[ 비상출격에 대비하여 조종석내에서 대기중인 조종사, 지루함을 잊기위해 책을 읽고 있다. ]
비상출격은 또 다른 성격의 임무였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무장을 가득 탑재한 채로 즉시 출격할 수 있도록 준비된 4대의 전투기를 활주로 끝에 준비시겨 놓곤 했다. 그렇지만 미그기가 아군의 작전에 큰 지장을 주는 경우가 아니라면 출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헛되이 기다리기만 하다가 임무를 마치곤 했다. 그렇지만 아주 드물게는 우리가 미처 활주로 끝에 비행기를 정렬시키기도 전에 출격명령이 떨어지기도 했다. 일단 출격하고 나면 그 이후의 상황은 전투기 소탕작전과 매우 비슷했는데 단 한가지 다른점이라면 지상기지의 레이더 장교의 통제하에서 작전하는 것 뿐이었다.
F-86에 대해서 한 마디 언급하자면 F-86 세이버는 그 당시의 전투기중에 캐딜락이라고 할수 최고의 기종이었다. 나는 여태까지 F-86으로 비행하는 것을 싫어하는 조종사를 본 적이 없었다. F-86은 속력이 아주 빠른데다가 아주 뛰어난 조종계통과 정확하고 효율적인 무장시스템을 장비하고 있었다. 북한의 하늘에서 우리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헌신적인 정비요원들과 지원설비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겐 정말 행운이었다. 미그기는 기체 성능상으로는 아주 뛰어난 적수였지만 훈련과 연습이 부족한 조종사들에 의해 운용되었다. 가끔은 예외적으로 아주 뛰어난 조종사도 있었지만 대개는 초보 수준의 조종사였다.
* 잊을수 없는 금발의 조종사
1952년 9월 14일 아주 더운 여름날이었다. 우리 비행대는 압록강 상의 수풍댐을 사진 정찰하는 RF-80을 호위하게 되었다. 비행단에서의 브리핑은 언제나처럼 똑같은 내용이었다.
- 적기 출현 가능성이 있음.
- 경계태세 필요.
- 정찰기의 무사귀환이 최우선 임무임.
다행스럽게도 내편대는 중거리 엄호임무를 맡게 되었다. 내 윙맨은 2차 대전에서 독일군을 상대로 야간 요격임무를 수행했던 캐나다 공군의 교환장교이자 우리 비행대의 대장인 에릭 스미스였다. 그는 겁이 없었고 탁월한 비행술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땅에서나 하늘에서나 아주 쾌활한 사람이었다. 우리 둘의 이륙순서는 세번째였는데 이륙 후 상승해서 수풍댐 상공에 도달할 때까지는 아무일도 없었다. 댐에 도달하자 RF-80은 카메라를 작동시키고 왼쪽으로 선회해서 압록강 남쪽 강변으로 하강하면서 의주와 신의주 부근의 사진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4대의 4기 편대가 한 편대는 상공에서, 또 다른 두 편대는 중간고도에서, 나머지 한 편대는 정찰기에 근접한 채로 갈짓자 비행을 하며 전투기에 의한 보호막을 구성하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한 무리의 미그기들이 강 건너편에 나타나 돌진해오기 시작했다. 맨 위에 있던 편대가 즉시 교전에 들어갔고 무전기를 통해서 들리는 흥분된 목소리들은 다른 F-86들도 공중전이 벌어지고 있는 공역으로 진입하게 만들어서 본격적인 공중전이 시작되었다. 전투기들이 위, 아래, 왼쪽, 오른쪽 할 것 없이 사방으로 움직이며 하늘을 가득 메웠고 미그기와 세이버를 구분하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 세이버의 건카메라에 잡힌 미그-15 격추장면 ]
마치 모든 전투기가 다른 누군가를 향해서 사격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난장판 속에서도 나는 RF-80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고 있었는데 그 옆에서 한 미그기가 F-86의 후미에 붙으며 사격을 가하는 것이 보였다. 나는 F-86에게 이탈하라고 소리쳤지만 내 외침은 공중전용 통신 채널의 포화상태 때문인지 그에게 전달되지 않은 것 같았다. 미그기가 사격을 가하는 동안 나와 에릭은 오른쪽으로 약간 강하하여 미그기의 바로 뒤로 접근할 수가 있었다. 약 1000피트 거리에서 내가 미그기의 테일 파이프에 사격을 가하자 그 미그기의 엔진부분에서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동체에서 화염을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을 때 미그기가 갑자기 급선회를 했다. 적기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들이 우리의 기체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다행스럽게도 공기 흡입구 속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만큼 파편이 떨어져 나갔지만 미그기는 아직도 균형을 잃지않고 비행하며 여전히 그의 앞에 있는 F-86을 향해 사격을 가하고 있었다. 미그기의 후류가 내 비행기를 들어 올려서 내 조준기의 조준점이 미그기의 동체 윗부분에 걸리는 순간에 나는 다시 한번 짧게 사격을 가했고 그와 동시에 미그기의 조종사가 탈출하려고 했는데 나는 그의 사출좌석에 총탄이 박혀있는 것을 보고 말았다. 사출좌석은 비행기에서 튕겨져 나와 잠시 멈춰있는 듯 하더니 거꾸로 뒤집히면서 내 조종석 옆을 스쳐 지나갔는데 조종사가 뒤집힌 채로 의자에 붙어 있는 것을 보니 피격에 의해서 어딘가를 다친것 같았다.
순간적이었지만 두려움에 떨며 일그러진 금발의 조종사의 얼굴은 나의 기억에 강하게 심어졌고 지금도 그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끝내 낙하산이 펴지지 않았고 나는 그 후로도 그 소련인 조종사에 대해서 많은 질문을 받았다. (소련 조종사들의 참전은 미군과는 달리 비공식적인 참전이었으므로 소련이나 북한에 의해서 강하게 부인되었지만 실제로는 많은 수가 공중전에 참가했다.) 나의 45번째 출격이었고 격추대수로는 3대째였다.
* 미그기들의 전법과 외로운 독수리
미그기 조종사들의 전법을 전술적으로 예측하기는 전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들은 아주 엉뚱한 짓에서부터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기동술을 다 쓰는것 같아 보였다. 4대의 편대가 1열로 강하하면서 동시에 사격하는 것에서부터 상공에서 선회하고 있는 편대에서 한대의 용감한 미그기가 빠져나가 잽싸게 사격하고는 다시 상승하여 편대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까지 정말 다양했다. 1952년 11월 18일에도 우리는 그런 용감한 미그기를 만났는데 (우리는 그런 미그기를 용감한 독수리라고 불렀다.) 이번에는 우리쪽에서 그를 격추시켜 버렸다. 그 날 우리는 전투기 소탕작전의 일환으로 압록강 남쪽 50마일쯤에 있는 청천강 부근의 다리를 폭격기들이 폭격하는 동안 미그기들이 요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우리 편대가 이륙시간이 약간 지연되어서 가장 마지막에 K-14 비행장을 이륙하게 되었는데 그 때 나는 제 334 비행대대의 작전장교로서 편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댄저 중위가 내 윙맨이었고, 피트 페르난데스 대위가 두번째 소편대의 선두기가 되고 멀린 미첼 대위가 그의 윙맨이 되었다. 이륙직후에 무선 주파수를 전투용으로 바꾸자 마자 무전기에서는 청천강에 도착한 직후 미그기의 습격을 받은 우리 앞 편대들의 흥분된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우리편대는 계획된 고도인 38,000피트까지 상승하여 외부 연료 탱크를 떨구고 잠깐씩의 연습사격으로 기총의 이상유무를 확인한 다음 낮은 강하각으로 강하하면서 속도를 음속까지 올렸다. 그러는 중에도 전방을 주시하면서 공중전의 흔적을 찾아 보려고 노력했지만 육안으로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지금 생각해 보면 천분의 일초였던거 같다.) 미그기 한대가 방금 우리 고도로 진입한 것을 보면 이런 미그기에는 틀림없이 외로운 독수리류의 조종사가 타고 있었다. 우리 아래에 있는 편대를 향하여 강하하면서 기관포를 쏘아대더니 다시 고개를 들어 우리가 있는 고도까지 상승했는데 그동안 에너지를 잃어버려서 그런지 속도가 낮아서 거의 실속직전이었다. 공교롭게도 우리는 음속에 가까운 엄청난 속도로 그를 향해 접근하고 있었고 기수를 약간 들자 거의 정지상태에 있던 미그기가 바로 눈 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거의 충돌할 것 같은 상황에서 나는 방아쇠를 움켜쥐었고 그 사격은 연속사격이라기 보다는 아주 순간적인 점사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게 오히려 내 생명을 구해 주었던 것 같다. 그 짧은 사격이 그의 연료탱크에 명중되고 그로 인한 내부 폭발이 미그기를 오른쪽으로 튕겨나가게 하는 바람에 나는 거의 날개를 스치며 가까스로 충돌을 피할 수 있었다. 이 모든 일이 1초내지 2초 동안 일어난 일이었는데 지금까지 내 생애에서 내 가슴이 이렇게까지 방망이질쳐 본적이 없었다. 뒤돌아 보자 그 미그기가 하얀 연기를 뿜으면서 긴 나선 강하에 들어가는 것이 보였는데 우유빛 코르크 나사같은 그 긴 연기자국은 미그기가 지상에 추락한 뒤에도 한동안 남아 있어서 보기 드문 광경을 연출해 주었다.
[ 임무를 마치고 김포 비행장에 착륙중인 세이버 ]
연료와 탄약을 거의 그대로 탑재한 채로 전투를 마치게 된 것도 그 날의 새로운 경험이었다. 보통때라면 공중전을 치룬 후에는 탄약을 완전히 소비한 채로 한계수준의 빠듯한 연료로 K-14로 돌아오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말이다.
그날은 모든게 너무 빨리 지나가 버려서인지 더 이상의 적기를 찾을 수 없었고 모든 미그기는 압록강 이북으로 철수해 버렸다. 우리는 연료의 기지귀환 시점을 나타내는 빙고상태까지 초계비행을 계속하다가 K-14로 돌아왔다. 나중에 무장사에게 들으니 총 1800발의 탄약중에 겨우 180여발만이 소비되었다고 했고 건 카메라의 필름에는 아주 짧게, 그러나 아주 뚜렷하게 격추 순간이 찍혀 있었다. 내가 격추시킨 미그기의 리벳자국까지 보일 정도로 뚜렷한 사진이었다. 아마도 그날은 내게 격추된 외로운 독수리 조종사나 나에게나 모두 가장 잊혀지지 않는 날이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