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3 : 폐허에서 일어선 날개 ◇ Act 4. 불타는 낙동강 (Struggle over Nakdong Riv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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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document was updated at 2003. 7. 14 대구 비행장 대구비행장에 도착한 바우트원대대의 기체들은 한국공군 제 51 임시 전투비행단으로 명명되었으나 이 부대의 지휘는 미군휘하에 있었다. 그나마 바우트원대대가 도착한 1950년 7월의 상황은 매우 절망적이었다. 전쟁이 시작된지 일주일만에 모든 전선에서 국군은 T-34 전차를 앞세우고 남침해 내려오는 북한군과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퇴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부대는 지휘관부터 병사들까지 지휘계통이 완전히 마비되거나 부대 자체가 와해되었고 사기는 땅에 떨어졌으며 제대로된 무기도 보급도 없는 상황에서 국군 병사들은 그저 남으로 남으로 밀리고 있었다. 일본에서 급히 날아와 수원에서 전황을 둘러본 맥아더는 최대한 빠른 시간내에 미군병력을 파견해서 북한군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미 24 사단장 딘소장 은 휘하의 부대중에서 가장 먼저 파견 준비가 된 스미스 중령이 지휘하는 21연대소속 1대대를 오산으로 급파했다. 그러나 제대로 실전에 대한 준비가 되지 않은채로 다급하게 오산으로 투입된 스미스대대는 북한군 107 전차연대와 보병 4사단으로부터 맹공을 받고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채 단시간만에 무려 150여명의 전사자를 남긴채 패퇴했다. [ 1950년 7월 2일 대구비행장에 최초로 모습을 나타낸 바우트원대대의 10기중 13번을 달고 있던 기체이다. 이기체를 누가 조종했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보기드문 컬러 사진으로 최초의 한국공군 머스탱의 도색을 잘 볼 수 있는 기체이다. 물웅덩이가 생겨 진흙탕이 되 버리기 일쑤인 대구 비행장의 상태도 잘 보여준다. 이 사진이 나온 미국서적에는 이 '13번'에 대해서 이색적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미국에서는 13이 불길한 숫자라고 금기시 되어 절대 비행기에는 마킹되지 않는 반면 한국에서는 13은 별로 신경쓰지 않고 오히려 숫자 4가 죽음을 의미한다고 하여 쓰여지지 않는다고 설명하고 있다. (사진제공 - 지원준님) ] 사실 이무렵의 미군도 상황이 형편없기는 마찬가지였다. 2차대전이 끝난지도 5년째로 접어들고 있어서 전투를 많이 경험한 역전의 병사들은 대부분 제대하여 본국으로 귀국한 상태였으며 대부분의 보병사단은 그저 이국의 정취에 끌려 군에 자원입대한 전투경험이라고는 전혀없는 10대후반이나 20대 초반의 신출내기들이었다. 그러나 미군병사들의 모습만 봐도 북한군은 지리멸렬해서 도주할 것이라면서 자만에 빠져있던 미군 사령부는 스미스대대가 커다란 손실을 입고 후퇴했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딘소장에게 즉시 24사단 병력을 이끌고 한국에가서 북한군이 대전을 점령하지 못하도록 막아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7월 12일부터 대전지역을 둘러싸고 방어선을 형성한 미군과 기세등등하게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게 되는데, 바로 이 대전지역의 하늘이 바우트원대대가 활약하게될 첫 무대였다.
한편, 대구비행장에 도착한 딘 헤스 소령은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었다. 말이 비행장이지 활주로는 온통 진흙탕 투성이었고 변변한 건물도 없어 조종사들이 머물 만한 숙소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즉시 부하들에게 활주로를 정비하도록 했으며 전투기들의 야전운용에 필요한 보급과 정비를 위해서 급하게 간이 건물과 전투기 주기장을 건설하도록 했다. 1950년 7월의 대구는 숨 막힐정도로 높은 습도를 동만한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고 있었으며 순식간에 활주로를 물바다로 만들어 버리는 장마비와 적군이고 아군이고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물어 대는 징그러운 모기떼가 기승을 부렸다. 이런 열악한 환경속에서 한국공군의 첫 도약이 시작된 것이다. 1950년 7월 3일, 대전에서 딘소장 휘하의 미 24 사단과 북한군이 대치상태게 되면서 딘 헤스 소령은 즉시 24 사단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아 첫 출격행에 나섰다. 그는 바우트원 대대의 한국 조종사들을 지휘하여 전선의 미군부대를 근접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은 상태였으나 사실 10여기의 머스탱을 가지고 게다가 실전 경험이 전무한 한국의 미숙한 조종사들을 지휘해서 작전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바우트원대대의 한국 조종사들은 모두들 싸우고자하는 의지만은 대단했지만 상황은 매우 어려웠다. 사방에서 밀려내려오는 적군을 맞아 지상공격에 나선 한국 조종사들은 모두들 최선을 다해 싸웠지만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더구나 7월 4일에는 한국 조종사들중 최고의 비행기술을 가졌다는 이근석 대령이 북한군 전차부대를 발견하고 지상공격을 시도하던 중 대공포화에 피격되어 전사하는 악재까지 발생했다. 이렇게 되자 헤스 소령은 이대로라면 며칠 이내에 바우트원대대가 소멸해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는 절대로 미군 교관 조종사들은 전투에 투입하지 말라는 지시를 무시하고 스스로 전선 상공으로 전투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한국 조종사들과 함께 출격하기 시작했다. 그는 휘하의 교관 조종사들을 독려하여 한국 조종사들을 리드하면서 지상공격 임무를 훈련과 병행하도록 했다. [ 전투에서 돌아온 기체를 수리하고 있는 미 정비병들, 이들은 초기에는 정비를 도맡았지만 기술을 배우고자 하는 열망에 불타는 한국 정비병들에게 기체 정비방법을 교육하기도 했다. ] 며칠뒤 필리핀과 일본의 미군부대에서 급히 정비를 받은 10여기의 F-51D 전폭기들이 딘소장의 24사단을 지원하기 위해서 대구로 속속 날아왔다. 그리하여 바우트원 대대의 한국 조종사들은 미군 소속의 F-51D 전폭기들과 같이 작전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 조종사들이 최선을 다해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대전은 7월 20일 북한군에게 함락되고 말았으며 이 기간 동안 1기의 F-51D가 손실되어 바우트원대대에의 F-51D는 8기만이 남게 되었다. 미 24 사단은 대전에서 북한군에게 치욕적인 참패를 당했으며 설상가상으로 사단장 딘 소장이 행방불명되었다가 결국 북한군에게 포로가 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며칠간의 전투비행후에 딘 헤스 소령은 바우트원대대의 미래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의 평가에 따르면 한국 조종사들의 전투의욕은 매우 높았지만 냉정하게 볼 때 실전을 수행할 만한 비행기술에 대해서는 더 훈련이 필요한 상태였다. 게다가 언어의 장벽도 커다란 걸림돌이었다. 모든 한국 조종사들이 영어를 거의 구사하지 못했기 때문에 미군 지상부대를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하기가 어렵고 이들을 관제하는 것도 매우 힘들어서 잘못하다가는 아군을 오폭할 우려도 있었다. 딘 헤스 자신도 한국 조종사들과 같이 비행할 때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한국 조종사들과 전투지역을 비행하는 것이 곤혹스러울 때가 많았다고 한다. 더구나 전투지역에서 미군과 함께 싸우고 있었던 한국육군 지휘관들도 문제였다. 헤스 소령의 자서전에 따르면 한국육군의 장교들은 자신들이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더라도 항공지원을 거의 요청하지 않았다고 한다. 후에 이유를 물어보니 대부분의 경우 영어가 서툴러 항공지원을 제대로 요청할 수도 없었고, 항공지원을 요청하게 되면 이로 인해서 무능한 장교로 낙일찍힐지도 모른다는 일견 엉뚱한 자존심 때문에 위기가 닥쳐도 항공지원을 주저했다는 것이었다. 이런 의사소통의 문제는 실제로 큰 문제가 되어 미공군의 F-51D 전폭기들이 전투지역의 한국군을 북한군으로 오인하고 오폭한 사건도 있었고 피난민의 행렬을 북한군으로 오인하고 기총소사를 퍼부은 미군기들도 속출했다. 이런 이야기를 듣게된 헤스 소령은 '한국육군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국공군을 키워야 한다.'라는 생각을 굳혔다고 한다. 위기 그러나 미군 지휘부는 이런 상황에 대해서 크게 우려했으며 전황이 너무 불리하기 때문에 한국공군의 재건과 같은 쓸데없는 일에 시간과 자원을 낭비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필리핀으로부터 차출되어 속속 대구로 도착하는 제 6002 전투폭격기 대대의 F-51D 전폭기들이 대구에 세력을 형성하자 미극동공군 사령부는 바우트원대대를 해체하고 모든 기체들을 미공군 6002 전투폭격기 대대로 흡수해서 편성해서 미군 조종사들로 하여금 조종하도록 하게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이런 지시가 내려지자마자 이때까지 열과 성을 다해 한국조종사들과 함께했던 딘 헤스 소령이 크게 반발했으며, 한국정부도 이승만 대통령과 김정렬 공군참모총장이 한목소리로 한국공군의 해체는 절대로 안된다고 항의했다. 헤스 소령은 상부의 지시를 받자마자 김영환 중령을 비롯한 한국 조종사들을 소집해서 일일히 면담을 했는데 그는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그 한국조종사들은 바우트원대대가 해체될지 모른다는 소식에 크게 낙담했지만 모두들 자신들이 탈 비행기가 없어진다면 즉시 육군에 자원입대해서 적군과 싸우겠다고 말했다. 그들의 의지는 진정으로 나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 바우트원대대에 이어 급히 대구에 도착한 미공군 제 6002 전투폭격기 대대 소속의 F-51D 전폭기들, 지상군의 근접엄호를 위해 급거 필리핀 주둔 미군부대에서 동원된 기체들로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서 큰 전공을 올린 기체들이다. 하마터면 바우트원 대대의 기체들이 이 부대로 흡수될 뻔 하기도 했다. ] 헤스 소령은 이들의 의지에 감동해서 절대로 이들이 해체되어서는 안된다는 내용의 탄원서를 팀버레이크 장군에게 올렸다. 그러자 팀버레이크 장군은 바우트원대대는 현행대로 유지시키되 딘 헤스 소령을 비롯한 바우트원대대의 미군 장교들과 병사들은 개인의 자유의지에 따라서 남거나 전속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지시가 내려지자 바우트원대대 소속의 대부분의 미군 교관 조종사들과 정비사들은 열악한 환경의 바우트원대대를 떠나 6002 전폭기대대로 전속을 신청했고, 미군 교관 조종사로는 딘 헤스 소령과 마이크 벨로윈 대위 2명만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13명의 미군 정비사들이 한국공군 정비사들과의 인연을 끊지 못하고 부대에 잔류하기를 희망했다. 이로서 한국공군은 해체의 위기를 간신히 넘기고 또다시 날아오를 수 있게 되었다. 불타는 낙동강
그러나 이러는 동안에도 북한군의 진격을 계속되었고 전선은 점점 밀리고 밀려 낙동강 지역을 둘러싼 이른 바 부산 방어선이 형성되게 되었고 절대로 밀리면 안된다는 배수의 진을 친 한국군과 미군병사들이 한치의 물러섬도 없는 방어선을 형성한 가운데 이를 뚫고자 공세를 계속하는 북한군이 낙동강 방어선으로 밀려들면서 이 좁은 지역을 둘러싸고 30만 이상의 병력이 서로 대치했고, 낙동강물을 붉은 피로 물들이고 하늘에 검은 연기가 난무하는 치열한 전투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벌어졌다. 일본에서 출격해 날아오는 F-80 제트전폭기들이 북한군의 전차부대를 사냥하고 항모에서 출동한 F9F 팬써 전폭기들이 교량을 파괴하는 작전에 돌입했으며, 고공으로 날아든 B-29 폭격기들은 낙동강 방어선 주위에 폭탄의 비를 퍼부었다. 그리고 전선에서 가장 가까운 대구 비행장의 F-51D 전폭기들은 지상부대의 요청에 따라 지상부대의 근접지원을 쉬지 않고 결행했다. 결국 대구 비행장은 최전선에 위치한 교두보가 되었고 이 지역에서는 미 6002 전폭기 대대와 바우트원대대의 F-51D들이 쉴새없이 이착륙하면서 북한군을 공격했다. [ 한국공군의 은인, 딘 헤스 소령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감사의 인사를 받고 있다. 그는 한국공군의 재건에 누구보다 헌신했으며 남들이 꺼리는 한국조종사들과의 혼성출격도 주저하지 않아 무려 250회 이상의 혼성 출격행에 나섰다고 하며 1951년의 1.4 후퇴때는 전쟁고아 1000여명을 제주도로 이동시키는 일까지 도맡았다. 그동안 이런 그의 업적은 잘 알려지지는 않았었지만 우리가 진정 감사해야할 은인임에 틀림없다. (사진제공 - 지원준님) ] 그러나 바우트원대대는 낙동강 전투에서 2명의 조종사와 기체를 더 잃게되었다. 그는 전황이 좋지 않더라도 최전선에서 작전하는 임무를 수행하기에는 한국조종사들의 아직 기량이 부족하므로 이들을 더 이상 희생시키지 말고 더 훈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결국 바우트원 대대를 이끌고 부산 근처의 사천 비행장 (K-4)로 이동했다. 그리고 마이크 벨로윈 대위와 헤스 소령은 한국 조종사들과 함께 혼성 편대를 이루고 강도높은 훈련을 반복하는 동시에 틈틈이 낙동강 지역의 근접 지원 비행을 계속했다. 이후 이들은 7월말에는 진해 비행장 (K-10)으로 다시 이동하여 계속 작전했다. 이후 8월 한달동안 미군을 비롯한 UN군과 한국군이 북한군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내면서 북한군은 보급이 떨어져가고 전력도 소진하여 기세가 한풀꺽였다. 8월말부터는 낙동간 전선이 비교적 안정되었고,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한 UN군 공군기들이 북한군이 머리를 내밀 틈도 주지 않고 기총소사와 폭격을 퍼부으면서 전선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한편, 부산으로 연일 밀려들어오는 군수물자들과 세계 16개국으로부터 파병된 UN군들로 전력의 재정비를 완료한 미군과 한국군은 이제 반격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북으로 북으로 1950년 9월 15일, 드디어 역사적인 인천 상륙작전이 시작되었다. 미해병대와 한국군 해병대가 노도와 같이 인천 해안으로 밀려들었으며 전혀 대비하지 못하고 있었던 인천 지역의 북한군은 단시간만에 일소되었다. 뒤통수에 일격을 맞은 북한군은 보급선이 완전히 끊긴데다가 부산 지역의 미군과 한국군이 공세로 전환하여 밀고 올라오면서 완전히 포위가 되어 전쟁이 시작된지 3달만에 형세가 역전되었다. 그리고 지리멸렬한 북한군은 개전초의 그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속절없이 패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우트원대대는 미공군과 함께 9월 27일 영등포 비행장 (K-24)으로 입성했으며 북진이 계속되면서 10월 28일에는 드디어 북한의 수도인 평양에 날아들었으며 여기서 한달여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전쟁은 점점 끝나가는 것으로 보였으며 통일의 순간은 며칠 남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 출격을 위해 활주로로 택싱중인 한국공군의 F-51D (사진제공 - 지원준님) ] 이제는 통일이 될지 모른다는 희망과 함께 북에서 철수한 한국공군 제 51 임시 전폭기대대 (바우트원 대대 - 한국공군에서는 이무렵 이 전투부대를 '백구부대'라는 호칭으로 불렀음)는 12월 6일, 대전 비행장 (K-5)에 자리를 잡았다. 이무렵 전황에 만족하고 있었던 미극동공군 사령부에서는 '한국육군의 지원은 한국공군이 해야한다'는 딘 헤스 소령의 의견에 동의하여 한국공군의 양성을 계속 추진하기로 결정했고 때마침 F-80으로 기종전환을 마친 일선 부대의 F-51D 잔여기들을 한국공군에게 공여하면서 한국공군은 수적으로도 불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급속히 한국공군 양성이 추진되면서 조종사들을 키우기 위한 훈련부대를 창설하여 제주 비행장 (K-40)으로 보내 미군 군사고문관과 경험있는 한국공군 조종사들의 지도로 훈련을 계속 받도록 했다. 드디어 한국공군은 해체의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나 대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 이번회의 연재에는 져니 (지원준)님께서 제공해주신 사진 자료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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