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항공전 3 부 - Desert Wings (북아프리카의 결전)

◇ Act 15. 엘 알라메인의 전송가

(Battle hymn over El Alamein)

         This document was updated at 2005. 11. 11

 

* 우리는 깃털빠진 독수리

1942년 후반에 이르러 아프리카 군단에게 찾아오기 시작한 최악의 상황은 북아프리카에서 용명을 떨치던 독일공군이라고 해도 피할 수 없었다. 몽고메리의 대반격 작전이 임박해오는 징후가 여기저기서 나타났지만, 이 무렵까지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독일공군의 전력은 계속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었는데 전투기, 폭격기, 정찰기등을 모조리 긁어모아봤자 겨우 290기의 가용기를 유지하고 있었을 뿐이었으며, 이중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가장 필수적인 전투기는 90여기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90여기의 전투기들이라도 이들 전투기가 모두 출격한다면 상당한 전력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이무렵 독일공군에게는 모든 전투기를 하늘로 날려 보낼수있는 연료가 없었다. 이것이 가장 문제였는데 연료가 너무나 부족하다보니 1942년 9월말부터는 전투지역에 대한 통상적인 순찰비행조차 제대로 시행할 수 없어 출격회수를 제한해야하는 형편이었다.

[ 영국공군기들의 공습을 받아 지상에서 대파된 Bf 109G-2 ]

이런 상황이다보니 서부사막의 제공권은 점점 빠른 속도로 영국 사막공군에게 넘어가고 있음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었다. 영국 전투기들은 그동안의 많은 손실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날아오르고 있었고, 독일공군 전투기부대의 강력한 적수인 정예전투기 스핏화이어도 점점 그 수가 늘어나고 있었으며, 그동안 독일 조종사들이 만난적이 없는 미국제 B-25와 같은 튼튼한 폭격기들이 공습에 가세하게 되면서 독일공군의 입장에서 모든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다.

특히 북아프리카 하늘의 주역이었던 주력 전투기 부대인 JG 27 전투비행단 제 1연대는 치열한 전투가 매일 계속되면서 한스 아놀트 슈탈슈미트 (59기 격추), 귄터 슈타인하우젠 (40기 격추)등과 같은 1급 전투기 조종사들이 하나둘 전사했으며 여기에 적의 1개 기갑사단과도 바꿀 수 없다는 '아프리카의 별' 마르세이유까지 비행사고로 사망하게 되자 연대전체가 정신적인 공황상태에 빠져들었다. 그동안 정신력만으로 버티고 있었던 JG 27의 전투피로도는 극한에달하게 되었으며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졌다.

결국 JG 27 전투비행단 제 1연대를 시칠리섬으로 잠시 철수시켜 휴식을 취하게하는 조치가 취해졌는데, 영국공군에게 가장 치명적인 손실일 입히며 맹활약하던 제 1연대의 철수로 인해 북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영국공군에게 물량의 열세뿐만 아니라 조종사들의 질적인 면에서도 전력이 크게 떨어진 상태가 되어 버렸다. 1942년 9월까지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날아올라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싸우며 영국공군을 몰아냈던 북아프리카의 독일공군은 불과 한달정도의 기간동안 최악의 상황으로 몰리게 된 것이다.

[ 격추된 ZG 26 소속의 Bf 110 - 영국 전투기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Bf 110과 같은 저성능기체들은 거의 살아남을 수 없었다. ]

지난기간동안 턱없이 부족한 보급상황에서도 불구하고 고군분투하면서 영국공군을 밀어붙여 북아프리카를 호령하던 최고 조종사들이 속속 전사하거나 전열에서 이탈하게 되자 남아있는 조종사들과 지상정비원들은 그들이 처하게된 암울한 상황에 그저 넉두리만 늘어놓을 수 밖에 없었다. 불과 얼마전까지 그들이 누렸던 화려한 영광이 순간은 이제 과거의 것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무렵 지구 저편에서는 소련군의 강력한 저항으로인해 동부전선의 규모가 너무나 방대해졌다. 동부전선은 마치 용광로처럼 독일의 모든 자원을 빨아들여 녹여없애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공군 사령부는 조종사 자원의 공급에 애를 먹고 있었다. 히틀러가 소련정복의 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모든 것을 대소련전선에 투입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공군은 대부분의 실력있는 조종사들을 격렬하게 달아오른 동부전선의 전장으로 투입해야 했다.

이러다보니 2선급의 전장으로 여겨지는 북아프리카에는 인력 손실을 보충할 만한 실력있는 조종사들의 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간신히 훈련과정을 이수한 햇병아리 조종사들만이 북아프리카 지역으로 배속되었다. 더구나 이들을 야전에서 지휘하고 훈련시켜야할 우수한 조종사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신참 조종사들은 사막에 도착하자마자 현지에 적응할 여유도 없이 즉시 척박한 사막의 하늘로 날아올라 실전에 투입되어야 했다. 그나마 부족한 전투기를 미숙한 초보 조종사들이 몰아야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런 조종사들은 공중전술은 고사하고 제대로된 편대비행이나 야전에서의 비행수칙등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으니 이런 조종사들이 실전에서 살아돌아올 확률은 매우 낮았다.

이시기에 사막에 배치된 조종사들과 정비요원들을 위로하기위해 전선을 방문했던 아돌프 갈란트는 사막의 처절한 현실에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그는 본국으로 돌아온후 괴링에게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올렸다.

"현재 북아프리카의 우리 공군은 너무나 열악한 상태입니다. 그들은 단지 80여기의 전투기전력으로 10배가 넘는 연합군의 항공전력과 맞서싸우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턱없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전투기도 조종사도, 연료도 탄약도 온전한 것이 없습니다.  이제 그들은 깃털빠진 독수리나 다름없는 상태입니다."

더구나 몰타섬이 추축국의 맹폭격을 이겨내고 완벽하게 살아나기 시작하면서 추축국의 수송항로가 또다시 크게 위협받게 되었다. 몰타섬에서 출격하는 영국공군기들은 단 한척의 추축국 선박도 리비아로 항해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듯이 무섭게 공격해왔고, 이러다보니 리비아로 도착하는 군수물자는 극소량에 달했으며 그나나 도착한 소량의 연료조차 대부분 전차부대에게 우선순위가 주어졌던 것이다.

[ 공습으로 파괴된 연료 수송차량 - 제공권의 상실로 인해 가뜩이나 모자란 연료의 공급이 더 어려워졌다. ]

설상가상으로 동부전선의 상황이 점점 어려워지면서 시칠리에 배치된 독일공군 전력의 상당수가 동부전선으로 이동하자 몰타섬의 영국공군은 완전하게 부활했다. 결국 추축국의 수송선단이 크게 위축되어 그수가 크게 줄어들게되자 몰타의 영국공군기들은 더욱 대담해져서 심지어는 스핏화이어의 호위를 받는 영국폭격기들이 몰타섬에서 이륙하여 독일군의 후방지역인 리비아의 추축군 지역으로 당당하게 날아와 폭탄을 떨어뜨리고 갈정도로 자유로운 활동을 하고 있었다.

 

* 영국 사막공군 제공권을 장악하다

극도로 어려워진 독일공군과 달리 이집트의 영국 사막공군은 1942년 6-9월까지 독일공군기들로부터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영국공군은 일본의 진주만 기습이후 새로운 동맹국이 된 미국으로부터 원조받은 고옥탄가의 연료를 충분히 가지고 있었고, 새롭게 공급되는 튼튼한 미제 전투기, 중형폭격기들도 운용하게 되었다. 여기에 영국본토에서 계속 증파되는 최신예 스핏화이어 Mk.V 전투기와 같은 질적인 면에서의 전력의 증강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사막공군은 지난 9월까지 독일군의 마지막 공세 기간동안 벌어졌던 치열한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며 많은 조종사들을 잃었지만 독일공군과 달리 손실된 조종사들을 넘어서는 조종사들을 충분하게 공급받고 있었다.

[ 야전 비행장에서 출격중인 영국공군의 허리케인 전폭기 - 사막의 척박한 환경에서도 매우 운용하기가 용이했던 만능 일꾼이었다. ]

독일군이 동부전선에 전력투구한지 1년이 넘어서자 독일의 위협에서 완전히 벗어나 모든 면에서 여유가 생긴 영국본토에서 군수물자와 인력을 이집트에 집중해서 공급 할 수 있었다. 더구나 1942년 6월에 태평양 한가운데서 벌어진 미드웨이해전에서 미해군이 일본해군의 기동부대에게 대승을 거두면서 태평양 전선쪽의 상황도 최악의 위기를 벗어나게 되었고 영국도 태평양쪽에서 한숨 돌리고 북아프리카에 전력을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무렵 서부사막 공군의 조종사 수급상황도 매우 좋아져서 영국본토 및 영연방국가들로부터 이집트로 배속되는 조종사들은 대부분 훈련과정을 충분히 이수하고 전투가 치열하지 않은 영국본토와 다른 분쟁 지역에서 충분한 비행 경험을 쌓은 후에 북아프리카로 배속되고 있었다.

[ 사막 하늘의 새로운 강자 스핏화이어, 영국공군의 제공권을 확실하게 해주는 존재들이었다. ]

조종사가 부족한 독일공군의 경우, 경험많은 에이스 조종사들이 최전선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들이 부상을 당하거나 죽을 때까지 날아올라 싸워야 했지만, 수적인 우세를 확고히한 영국공군은 경험많은 조종사들을 최일선에서 일단 빼내 사막지역에 막 도착한 신참 조종사들을 훈련시키는 교관의 역할로 돌릴 수가 있었다. 물론 이런 임무보다는 실전에서 싸우는 것을 더 바라는 에이스 조종사들도 있었지만, 그들의 경험에서 우러난 교육의 효과는 매우커서 사막지역이라는 척박한 환경에 처음 맞닥드린 신참 조종사들에게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이러다보니 시간이 흐를수록 조종사들의 평균적인 수준에서도 서부사막공군은 그동안의 열세에서 벗어나 독일공군을 압도하는 역전현상이 점차 진행되었다.

결국 영국 사막공군은 엘알라메인 대공세 직전에는 즉시 전투에 투입가능한 기체수가 750여기에 이를정도로 압도적인 공군전력을 가지게 되었고, 더구나 이 수치는 날이 지나갈수록 하루 하루 더 증가하고 있었다. 영국군은 독일공군기들의 활동이 뜸해지자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한후 지속적인 순찰비행과 주요 보급로, 비행장등에 대한 공습작전을 실시했다. 이무렵부터는 엘 알라메인의 하늘에 보이는 비행기는 거의 모두 영국공군기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제공권을 완전히 얻어낸 영국공군기들은 눈에보이는 목표들에대해 기총소사, 폭격을 거침없이 퍼붓고 있었으며 지상의 독일군들은 수시로 덤벼드는 영국전폭기들의 기총소사로 인해 주간에는 참호속에 틀어밖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 영국공군의 공습직후에 촬영된 더나 비행장, 독일공군의 어려운 상황을 잘 보여준다. ]

특히 독일공군의 남은 전력을 완전히 소모시켜 버리라는 몽고메리의 명령에따라 엘알라메인 대공세가 시작되기 전까지 하루 수차례의 독일비행장 공습작전을 결행하여 독일공군의 전력을 계속 소모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전선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푸카 비행장과 같은 독일공군의 주요야전 기지들은 지속적인 폭격을 받아 그 기능을 점점 잃어가게 되었는데, 10월 9일에는 키티호크 전폭기들과 볼티모어 폭격기들의 기습적인 공습으로 인해 푸카 비행장에서는 무려 13기의 JG 53 전투비행단 소속의 Bf 109F-4 전투기들이 지상에 앉은 채로 격파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사실 이날의 공습에서 대부분의 Bf 109 전투기들은 교체부품의 부족으로 인해 정비상태가 매우 불량했으며 기체에 연료가 제대로 공급되지 못하여 공습에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지상에서 격파되었던 것이다.

 

* 엘알라메인의 전송가

드디어 롬멜과 아프리카군단에게 운명의 날이 다가왔다. 독일군에 비해 2배이상에 달하는 20만의 병력과 1000대 이상의 전차를 보유하게 되어 전력의 확실한 우위를 확보한 몽고메리는 독일군과 대치하고 있는 최전선에 대규모 병력을 은밀하게 투입했으며 갖은 기만전술을 사용해 독일군의 정보망을 교란시키면서 영국군의 공세시기와 공세지점에 대해서 온갖 가짜 정보를 흘렸다. 그리고 모든 전력을 한꺼번에 쏟아부어 독일군에게 KO 펀치를 먹이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몽고메리가 정한 공격시일은 1942년 10월 23일이었다.

[ 영국 제 8군의 중포가 불을 뿜는다 - 엘 알라메인 대공세의 시작을 상징하는 사진 ]

작전은 밤에 시작되었다. 오후 9시 40분, 많은 영국폭격기들이 폭음을 울리며 독일군 진영으로 날아가기 시작했으며 이들이 폭탄을 떨어뜨리는 것을 시작으로 대반격을 위해 배치된 엄청난 수의 대포들이 동시에 불을 뿜었다. 하늘이 떠나갈 듯한 굉음과 함께 북아프리카 전선의 개전후 최대규모인 총 900여문의 대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고 엄청난 섬광이 지평선을 뒤덮은 것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전격적이고 완전한 기습이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대규모의 포격이 갑자기 시작되면서 지옥과 같은 불길과 폭풍이 모든 것을 삼켜 버릴 듯한 기세로 독일군을 덥치고 있었다.

[ 돌격! 앞으로! - 포연을 헤치고 전선을 질주중인 영국 병사들, 연출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엘 알라메인전투중 종군기자가 촬영한 것이라고 한다. ]

독일방어군은 엄청난 혼란에 빠졌으며 엎친데 덥친격으로 아프리카에서 얻은 풍토병으로 독일본토에서 잠시 요양중이던 롬멜을 대신해 아프리카군단을 지휘하고 있던 시투메 대장이 집중포격으로 인한 혼란의 와중에 지휘차량안에서 급작스런 심장마비로 사망하면서 최고 지휘관마저 잃게 되었다.

선제 포격이 시작된후 얼마 지나지않아 모든 전선에서 영국 보병과 전차들이 총 공세에 나섰다. 이들은 독일군이 매설해놓은 엄청난 수의 지뢰를 손과 칼로 파내며 한발한발 전진해나아갔다. 그러나 역전의 독일아프리카군단 병사들 방어전에 나서기 시작했다. 요소요소에 배치된 독일군의 기관총좌와 대전차포들중 많은 수가 포격와중에서 살아남아 전열을 가다듬고 영국군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전진하던 영국군은 독일군의 십자포화에 걸려 큰 피해를 입게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면적인 전진은 불가능했으며 한걸음이라도 나아가기 위해서는 엄청난 피를 대가로 내놓아야 했다.

 [ 북아프리카에 등장한 새로운 강자 - 미제 셔먼전차, 독일군의 4호전차와 대등한 전투를 벌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

독일군의 대응이 시작되면서 공격측인 영국군도 큰 타격을 받았고 여기저기서 심각한 피해보고가 들어왔으나 몽고메리는 이번에는 어떠한 희생이 치루더라도 독일군의 전선을 붕괴시켜야 한다는 엄명을 내려놓았다. 그는 아무리 아군의 피해가 크더라도 적과 아군이 똑같은 피해를 입게 된다면 물량면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영국군이 얼마안가 주도권을 쥐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공격에나선 영국군은 이날 밤동안 지옥과도 같은 불길속에서 사투를 벌이면서 한발씩 전진을 계속했다. 양측의 포격은 사막의 밤을 대낮같이 환하게 만들었으며 밤새도록 계속된 전투에서 영국군은 약 6000여명의 사상자와 50여대의 전차를 잃어가면서도 결국 지뢰밭과 독일군의 방어선돌파에 성공한 것이다. 날이 밝아오르면서 여기저기서 전선이 돌파되고 영국군 전차들이 마구 쏟아져들어오기 시작하자 열악한 보급상황에서도 오로지 의지하나로 꾿꾿하게 버티던 독일군 방어진지들도 하나하나 붕괴되기 시작했다.

[ 연막속에서 전차와 함께 돌격중인 영국 보병들 ]

아프리카에서 얻은 풍토병으로 인해 본토에서 잠시 요양중이던 롬멜이 급보를 받고 10월 24일 저녁 독일에서 황급하게 날아왔지만, 롬멜은 전선의 상황이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빠른 속도로 악화되고 있는 것에 놀라게 되었다. 그동안 방어전을 총 지휘하고 있던 리터 폰 토마대장은 이날 롬멜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 했다.

"지난 전투에 우리는 전력으로 맞섰지만 상황은 최악입니다. 우리가 가진 연료는 거의 바닥나 버렸으며 이제 우리는 그나마 몇대안되는 전차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곧 우리 독일군의 전면적인 붕괴가 눈앞에 다가올 것 같습니다."

 

* 공세에나선 영국공군과 무너지는 독일공군

지상에서 아프리카군단이 붕괴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지만  엘알라메인 대공세를 맞이한 독일공군은 지상군을 지원하기위해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엘알라메인 대공세의 초기부터 활발하게 활동하는 영국공군과 미공군의 전폭기들과 중형폭격기들이 압도적인 물량을 앞세워 매일 하루 수차례씩 푸카, 쿼타피야, 다바, 카사바, 시디 하네시등의 주요 독일공군 비행장들을 계속 맹폭하고 있었으므로 , 조종사들은 하늘에 날아올라 자신의 비행장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상태였다.

[ 모래먼지를 휘날리며 이륙중인 112 대대 소속의 키티호크 전폭기 ]

간신히 살아돌아온 조종사들은 엉망이 되어 버린 활주로와 연료부족, 정비불량으로 인해 이중고를 겪었다. 이러다보니 공중전에서 격추되는 기체보다 지상에서 폭탄에 맞아 파괴되거나 고장, 연료부족등으로 전열에서 이탈하는 기체들이 더 많았으며 공세 개시후 1주일이 지나자 소모되는 기체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수치상으로는 거의 전멸에 가까운 지경이 되었고 영국군의 공세를 저지하기 위한 출격행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JG 27 전투비행단을 비롯한 독일공군이 누렸던 아프리카 하늘의 영광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이 처한 상황은 너무나도 암울한 것이었다. 그들이 이룩했던 모든 것이 너무나 빨리 사막의 모래먼지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 추락한 Bf 109F 전투기를 구경하고 있는 영국병사들 - 독일공군의 최후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

엘 알라메인 전투가 시작된후 며칠만에 독일공군기들이 거의 날아오르지 못하게되자 영국조종사들의 사기는 더욱 높아졌다. 그들을 그토록 괴롭히던 독일전투기들이 이제는 앉은뱅이 오리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제 영국 조종사들이 할 일이라고는 그저 높이 날아올라 지상의 독일군을 찾아낸후 직선으로 내리덥쳐 발사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전선의 독일공군이 거의 전멸한 것으로 확신한 영국공군은 공격목표를 리비아에서 엘 알라메인에 이르는 추축군의 보급로로 변경했으며, 이때부터 해안도로를 따라 움직이는 것은 무었이든지 기총소사와 폭탄세례를 얻어맞았다. 결국 단 한 대의 추축군 보급차량도 영국공군기들의 감시망을 통과하지 못하고 파괴되었다.

[ 알라메인 대공세에서 영국공군의 작전도 - 대부분 격전의 현장이외에도 리비아까지 이르는 모든 해안도로가 공습 목표가 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추축국의 보급로와 퇴각로를 완벽하게 차단하려는 의도였다. ]

몽고메리의 대공세에 패배를 직감한 롬멜이 전군에 본격적인 후퇴를 명령하면서 11월 2일경에는 독일공군도 더 이상의 작전이 불가능한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대부분의 야전비행장을 포기하고 잔존세력을 서쪽으로 후퇴 시킬 수 밖에는 없었다. 이무렵 독일공군 사령부에서 북아프리카의 상황이 너무나 급박하다는 보고를 받은 괴링은 할 수 없이 시칠리의 공군기들을 리비아로 날려보냄과 동시에 동부전선에서 일부 전투기부대를 빼내 북아프리카로 투입한다는 결정을 내렸는데, 이에 소련공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던  JG 77 전투비행단이 큰 피해를 입은 JG 27과 JG 53을 지원하기 위해 북아프리카 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 40mm 대전차포를 장착하고 독일전차를 공격하는 탱크킬러 허리케인 전투기 ]

독일공군은 거의 전멸상태에 몰린 몰린 JG 27 전투비행단을 북아프리카에서 완전히 물러나게하고, 대신 JG 77의 전력으로 완전히 대체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이때 JG 77을 지휘하고 있던 비행단장은 사람은 얼마전 몰타섬의 상공에서 JG 26 전투비행단 제 7중대장으로서 영국공군을 빈사상태로 내몰며  용명을 떨쳤던 요아힘 뮌히버그였다. 그러나 이런 조치에도 불고하고 영국공군에게 완전히 넘어간 북아프리카 하늘의 제공권을 다시 찾아온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 전멸의 위기에서 튀니스로 후퇴한 JG 53 소속의 Bf 109G-2 trop ]

이제는 북아프리카 하늘에서도 완벽한 패배가 임박했다. 아슬아슬하게 버티다가 본격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하는 북아프리카 군단의 비극적인 운명을 독일공군도 거스를 수는 없었다.

 

* 패배의 기로에서

롬멜은 전술위 귀재답게 어떻게든지 전세를 뒤집어보려고 했으며 그의 지휘를 받는 독일군은 2 대 1 이상의 절대적인 수적 열세속에서도 필사적으로 맞서 싸웠지만 몽고메리의 엄명을 받은 영국군 역시 용감하게 돌진해들어왔다. 11월 2일에는 개전이래 최대규모의 전차전이 벌어졌으며 공격하는 영국군과 방어전에 나선 독일군 양측이 서로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맞서싸우는 동안 양쪽모두 손실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양측의 기갑부대들이 탁트인 사막에서 정면으로 마주쳐 대결했으며 서로 한치의 물러섬이 없이 철갑탄을 주고 받았다.

[ 파괴된 마틸다 전차 - 전차부족에 시달리던 독일군은 이와 같이 노획한 영국전차들도 사용했다. ]

이내 사막전체가 포격에 맞아 산산조각이 되어 버리거나 불길과 함께 검은 연기에 휩쌓인 전차들의 잔해로 뒤덮여 거대한 강철의 무덤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항공지원에 나선 영국 전폭기들은 사막의 모래먼지와 포연으로 인해 아군과 적군의 구별이 어려워 그저 상공을 빙빙 돌기만했다.

[ 아프리카 군단의 3호 전차 - 전차장이 영국군의 진격상황을 살피고 있다. ]

그러나 이렇게 쌍방의 손실이 엇비슷하게 증가될수록 먼저 전력이 바닥나는 쪽은 물자부족에 시달리던 독일측이었다. 결국 전투개시후 12일이 지나자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단 한순간도 쉴새없이 벌어졌던 격렬한 전투속에서 롬멜은 약 3만2천명의 부하장병을 잃었으며 그가 보유하고 있었던 기갑전력중에서 거의 90%에 가까운 450대 이상의 전차와 1000문에 달하는 화포전력을 상실했던 것이다.

롬멜에게 있어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손실된 전차들중 많은 수가 적의 포탄에 맞기전에 연료가 바닥나 멈춰서고 말았다는 점이었다. 제아무리 전설적인 사막의 여우라고 해도 이런 절대절명의 위기상황속에서는 작전상 후퇴이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물론 정면돌파를 감행해온 몽고메리의 영국군도 엄청난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영국군에게는 아직도 얼마든지 전선으로 즉시 투입할 수 있는 충분한 전력과 물자가 남아있었다. 그리고 몽고메리는 아군의 피해가 아무리 크더라도 이번만큼은 완전한 끝장을 볼 때까지는 공격을 멈출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 불길에 휩쌓인 영국전차 - 영국군의 희생도 막대했다. ]

이대로 전투가 계속되다가는 그의 아프리카 군단이 전멸하게 되리라는 것을 인지한 롬멜은 '후퇴는 불가하며 전 장병은 현위치를 고수하라'는 히틀러의 어처구니없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퇴각을 지시했으며 결국 최종적으로 패배가 확실해지던 11월 4일 히틀러마저 철수에 동의하자 부하들에게 모든 전선에서 즉시 전투를 중단하고 전격적인 후퇴를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드디어 엘알라메인 대전투의 승패가 갈렸으니, 이 커다란 싸움의 승자는 사막의 여우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던 사막의 쥐였다.

비록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승자인 영국군이 입은 피해도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무려 1만5천에 가까운 장병들이 사상했으며 지뢰밭과 대전차포화망을 정면으로 돌파하다가 전멸에 가까운 대피해를 입은 기갑사단도 여럿 있었다. 대부분의 야전 지휘관들은 부하들의 피로 물든 전장의 참상에 몸서리를 쳤으며 그들이 이렇게 큰 피해를 입고도 정말로 승리한 것인가를 의심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독일군이 물러간뒤 전장의 상황을 살피던 몽고메리는 격파당한 독일전차들을 배경으로 치열한 취재경쟁을 펼치는 종군기자단에 둘러쌓여 특유의 자신감이 넘치는 포즈로 다음과 같이 승리를 선언했다.

"정말 멋진 전투였다. 이것은 완벽한 승리이며 적은 완전히 괴멸되었다. 이제 롬멜은 끝장이났다!"

물론 몽고메리는 롬멜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하기는 했으나 멋진 전투라는 표현은 사실과는 달랐다. 12일간의 치열한 전투기간동안 영국군은 어떤 기발한 전술이나 멋진 기동술을 구사한 것이 아니었고 오로지 숫자와 화력에 의지한 전투를 벌여 독일군을 물리친 것이다. 그리고 사실 엘알라메인 전투가 완벽한 승리라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이것은 영국군이 패주하는 독일군을 완전히 섬멸할 기회가 여러번 있었으나 번번이 기회를 놓쳐 롬멜에게 성공적인 철수를 허용했기 때문이었다.

[ 완벽한 패배의 순간앞에 고뇌하고 있는 롬멜 ]

비록 엘알라메인 전투에서 패배하기는 했으나 롬멜은 어떻게 해서든지 잔존병력을 리비아로 무사히 귀환시키고자 했다. 패퇴한 독일군은 서쪽으로 무려 2000km가 넘는 거리를 이동해야 했는데, 맹열하게 추격해오는 영국지상군과 그들을 괴롭히는 영국공군으로 인해 후퇴하는 것도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롬멜은 우선 전 부대원들에게 어떻게든지 탈출하여 엘알라메인에서 서쪽으로 400km 떨어진 샬롬파 할파야 고개까지 신속하게 후퇴할 것을 지시했다. 그는 천연의 요새인 이 할파야 고개에서 마지막 방어전을 펼쳐 영국군의 추격을 최대한 지연시키고 잔존 병력을 리비아까지 무사히 탈출시키고자 했다. 마지막까지 포기할줄 몰랐던 롬멜은 이 할파야 고개에서 추격해오던 영국군에게 큰 피해를 주는데 성공했으며 이로인해 영국군의 추격이 잠시 멈추어선 틈을타서 잔존병력을 무사히 후퇴시키는데 성공했다.

사실 영국의 입장에서는 패주하는 독일군에게 완벽한 타격을 줄 수 있었던 매우 안타까운 기회가 있었다. 이무렵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의 잔존병력들은 좁은 해안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무질서하게 패주하고 있었고, 그들은 가능한 많은 부상병들도 같이 데리고 후퇴하고자 했다. 이러다보니 이 해안도로에 밀집된 후퇴의 행열이 영국공군기들의 공습에 거의 무방비로 노출되어 버린 것이다. 만일 이상태에서 영국공군기들에게 발견이라도 된다면 추축군에게는 커다란 위기가 찾아올 가능성이 높았다.

[ 패주하는 독일군을 추격하는 영국전차부대 - 이후 약 3개월간 무려 2200km에 걸친 추격전이 벌어진다. ]

영국군에게 가장 아쉬웠던 순간은 독일군이 철수하기 시작한뒤 2일째인 11월 6일에 벌어졌다. 이날 오전 2시 45분 해안도로를 따라 정찰을 실시하던 영국 정찰기 조종사의 눈에 먼지를 일으키면서 서쪽으로 후퇴중인 병력과 차량들이 발견된 것이다. 이 조종사는 엄청난 숫자의 차량과 병력들이 무질서하게 뒤엉켜 후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며 너무나 혼잡하여 교통체증에 시달리는 모습을 촬영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귀환하자마자 이 사실을 상부에 보고했다.

그러나 대전투를 치룬지 얼마되지 않아 엄청난 손실을 수습하고 있었던 영국 제 8군 사령부는 이런 보고를 받았음에도 공군과의 통신체계가 엉망이 된 상태로 완전히 복구되지 않은 상태여서 제대로 출격요청을 하지 못했다. 결국 이날은 통상적인 수준인 불과 5회의 출격행만이 이루어졌으며 독일군은 약간의 병력만을 손실한후 대부분 무사히 서쪽으로 더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무렵에는 질서도 어느정도 회복된 상태였으므로 후퇴의 속도가 더 빨라졌다.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는 질책을 받은 영국공군은 다음날 부랴부랴 많은 폭격기들을 동원해 공습에 나서 이틀밤낮동안 무려 150톤에 달하는 폭탄을 계속 투하했지만 얼마되지 않는 차량만이 파괴되었을뿐 대부분의 독일병력은 무사히 영국군의 추격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 횃불과 함께 사라지다

엘 알라메인의 대전투에 모든 신경이 집중된사이 미군과 영국군은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독일군을 완전히 숨통을 끊어 버리려는 또하나의 작전을 결행했다. 그것은 독일군의 후방지역에 기습적인 대규모 상륙작전을 결행하여 퇴각해오는 독일군을 배후에서 압박하려는 것이었다.

[ 토치 작전 - 1942년 11월 8일 ]

1942년 11월 7일 은밀하게 지중해로 접어들어 북아프리카 해안에 접근한 미-영군의 대함대는 다음날인 11월 8일 새벽 무려 10만 7천에 달하는 병력을 모로코와 알제리의 해안 3군데에 나누어 내려놓은 것이다. 이것은 그때까지 역사상 최대규모의 상륙작전이었으나 독일군이 연합군의 상륙지점에대해 잘못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큰 피해없이 무난히 상륙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 비록 패배한 장군임에도 아직까지도 가장 전설적인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는 롬멜 ]

엘 알라메인의 대패에 더해서 토치작전이 결행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서쪽으로 서쪽으로 트리폴리를 거쳐 튀지스를 향한 장거리 철수를 하고 있었던 롬멜은 이제 더 이상 북아프리카에서 독일군이 재기할 수는 없다는 것을 직감했고 결국 완벽한 패배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신출귀몰한 전술로 2년가까운 기간동안 영국군을 농락했던 사막의 여우도 북아프리카를 떠날수밖에는 없었으며 그가 이룩했던 전설도 모래바람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 토치 작전으로 드디어 미군이 북아프리카에 모습을 나타냈다. 이로서 북아프리카의 독일군에게는 모든 것이 최악의 상황으로 몰리게 되었다. ]

엘알라메인의 대전투이후 북아프리카에서는 사실상 모든 것이 끝났다. 물론 토치작전 이후에도 몇 개월간 북아프리카에서는 연합군과 독일군의 전투가 여러차례 있었지만, 이무렵 부터의 전투는 '진격해오는 연합군과 후퇴하며 싸우는 독일군'이라는 전쟁 말기의 전형적 양상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물론 독일공군도 완전히 포기한 상태는 아니었으며, 이지역으로 파견된 독일공군도 연합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날아올라 고군분투했지만 커다란 전력의 열세로 인해 독일공군의 힘만으로는 연합군의 진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

[ 튀지니에서 연합군에게 노획된 JG 53 소속의 Bf 109G-2 trop ]

1943년 3월 23일에는 JG 77 전투비행단장을 맡아 미-영 연합군의 막강한 공군력에 맞서고 있던 요아힘 뮌히버그가 스핏화이어 전투기들과의 치열한 근접공중전 도중에 전사하게 되어 독일공군은 북아프리카 하늘에서 또 한명의 영웅을 잃게 되었다. 그리고 독일공군은 이제는 더 이상 싸울 기력을 잃게 되었고 결국 지친 날개를 접고 그들이 누렸던 모든 영광의 순간을 서부사막의 모래속에 묻어 버린 채 북아프리카를 완전히 떠나야 했다.

1943년 5월 모든 독일군이 시칠리로 철군하면서 북아프리카에서의 길고도 처절한 전투는 연합군의 승리로 완전히 끝나게 되었다. 

 

foxmouse: 2년전 야심차게 시작했던 지중해-북아프리카 항공전이 드디어 마무리 되었습니다. 사실 1년도 안되어 끝낼 수 있었음에도 홈지기의 게으름으로 인해 무려 2년여를 넘겨서야 끝을 볼 수 있었네요. 물론 이번에도 많은 아쉬움을 남긴채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로 그동안의 연재중에 가장 어려운 항공전사 부분이 아니었나 하고 생각해 봅니다. 홈지기 스스로도 너무나 모르는 것이 많아서 이번에도 이 항공전사가 제대로 연재 되었는지는 솔직히 의문입니다. 만일 연재의 내용에 틀린 부분이 발견되면 언제든지 홈지기에게 메일을 주시거나 게시판을 통해서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

토치 작전이후부터 북아프리카에서 벌어졌던 항공전은 미군의 참전으로 인한 변화가 최초로 시작되는 나름대로 흥미있는 내용이 많이 있지만 일단은 간략하게 마무리된 상태이입니다. 이부분은 훗날 이탈리아 전선을 다루게될 때 보다 자세한 내용으로 다시 시작해 볼 예정입니다.

여하간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니 정말 시원섭섭합니다. 그동안 지루한 연재를 읽어주시느라 수고하신 불타는 하늘의 식구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훗날 시간이 허락하면 '북아프리카 항공전 후기'를 추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ㄷ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