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IV : 얼어붙은 동부전선
(Operation Typhoon)
This document was updated at 2014. 1. 1
* 불길한 징후
바바로사 작전이 시작된후 1주일도 안되는 기간동안 독일공군은 이 거대한 전장의 주역이 되어 거의 완벽하게 주어진 임무를 소화했다. 처음 며칠동안은 그야말로 독일공군이 최고의 활약으로 전쟁의 양상을 주도했다. 독일군의 진격로에 방해가 될 만한 소련 공군 비행장은 모두 파괴되거나 점령되었으며 끈질기게 저항해오는 소련기들도 대부분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것이다.
그런데 너무 빠른 시간만에 소련공군이 거의 괴멸상태에 빠져 버리고 세계최강의 실력을 가진 전차부대를 앞세운 독일육군이 빠르게 소련영토로 진격해들어가면서 독일공군은 독자적으로 수행할 만한 고유의 임무가 없어져 버린 상태가 된 것이다. 이후부터는 대부분의 독일공군부대들이 철저하게 소련영토로 진격해들어가는 지상군을 원호하고 근접지원을 하는 쪽으로 임무를 변경했다. 드넓은 소련의 대초원을 가로질러 진격하는 독일육군의 진군속도가 워낙 빠르다보니 이들을 원호하기 위해서 독일공군도 지상군의 진격로를 따라 잠시도 쉴새없이 전선으로 이동해야 했으며, 점령된 적의 비행장을 재활용하거나 새롭게 야전비행장을 건설하여 임시 야전기지로 활용해야 했다.
[ 동부전선의 열악한 임시 비행장에서 출격 준비중인 슈투카 ]
그런데 소련의 영토가 애초에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넓다는 것이 문제였다. 독일육군이 전진해 들어갈때마다 전선은 부채꼴 모양으로 끝도없이 계속 넓어졌으며 보급로도 점점 길어졌다. 이렇게 되면서 독일공군도 그동안 겪어보지 못한 난관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동안의 서부 유럽전이나 영국본토항공전에서는 안정된 기지에서 출격한 기체들이 작전을 마치고 귀환한후에 정비와 재무장, 재급유가 원활하게 이루어졌지만, 이 동부전선에서는 상황이 많이 달랐던 것이다.
특히 보급로가 매우 길어진 7월말부터는 더욱 상황이 어려워지고 있었다. 독일본토에서부터 최전선까지의 거리가 너무나 멀어지다보니 연료와 탄약과 같은 가장 필수적인 보급품들을 야전기지로 운반해오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독일군의 보급부대는 그동안 폴란드, 베네룩스 삼국, 프랑스 전투에서 전격전을 성공적으로 뒷받침하며 맹활약했으나, 광대한 소련전선에서는 그들이 경험했던 것을 훨씬 초과하는 엄청난 업무량에 직면한 것이다.
하루가 지날때마다 전선이 빠르게 확장되고 멀어지면서 전선부대가 필요로 하는 군량과 연료, 탄약등 가장 필수적인 보급품의 수요량만해도 보급부대가 감당하기에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증가했다. 소련전선은 서부 유럽과 달리 제대로된 포장도로가 거의 없었으며 이른바 '롤반'이라고 불리는 대초원에서 가장 상태가 좋은 길조차도 흙먼지 투성이의 울퉁불퉁한 시골길 정도인 상태여서 서유럽의 기준으로 볼때는 도로라기 보다는 맨땅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인 매우 열악한 상태였던 것이다. 더욱이 이런 롤반조차도 별로 많지 않아서 보급부대의 고충은 이루 말로 못할 정도였다.
[ 끝없이 동쪽으로 진군하는 최전선의 부대에게 보급선을 유지하기 위한 보급부대의 노고는 실로 처절할 정도였다. 아군기의 공습을 받지 않기 위해 붉은 나찌 깃발을 차량위에 붙여놓은 것이 이색적인 풍경 ]
물론 공군은 수송기를 이용하여 물자를 빠르게 보급받을 수는 있었으나 항공수송에 의한 보급량만 가지고는 작전을 수행하는 것이 매우 불충분했으므로 역시 지상보급망이 필요했기 때문에 상황이 낙관적일 수는 없었다. 개전 2주째인 7월초에 휘하의 부대를 시찰하던 제 8 항공군단 (Fligerkorps VIII)의 사령관 볼프람 폰 리히토펜은 연일 계속되는 승전보에 들떠있는 부하들을 보면서 기쁜 맘이 들면서도 뭔지모를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특히 휘하부대를 시찰하면서 일선의 보급장교들이 그에게 토로하는 고충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날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소련과의 전쟁에서 가장 어렵고 중요한 것은 바로 보급이다! 이 광활한 전선에서 만약 보급선이 제대로 유지되지 않으면 우리는 조만간 커다란 난관에 직면할 것이다."
보급의 어려움에 더해서 독일공군이 노출한 또하나의 불안요소는 개전초부터 지적되었던 것으로서, 전선을 유지하기에 필요한 항공기의 숫자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소련전선의 특성상 독일군이 전진해 들어갈수록 전선은 부채꼴 형태로 점점 확대되기 때문에 전선 상공을 순찰하고 지상군의 지원에 필수적인 항공기 세력을 유지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이다.
특정 전락적 요충지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질 때는 전투지역의 상공에 항공전력을 집중하여 효과적으로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지만 전투가 끝난후 점령지역이 늘어나고 전선이 확대되면 이 점령지와 전선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항공순찰 및 지상군 지원을 해야하는 항공기들의 수요가 너무나 크게 늘어났던 것이다. 그에 반해 독일공군기들의 숫자는 개전이후 그다지 증강되지 못했으며 각부대마다 전력이 오히려 줄어들지만 않았으면 다행일 정도였다.
[ 격추된 JG 53소속 Bf 109F의 잔해를 조사중인 소련군들, 이런 사진은 바닥까지 떨어진 국민의 사기를 고취시키기 위한 선전지에 주로 사용되었다. ]
개전이후 엄청난 승리가 계속되면서 위험신호들이 무시되고 있었지만 일선 지휘관들이 보기에 특히 우려스러운 것은 누적되는 손실로 인한 전력 저하의 정도가 생각보다 심각한 수준이었다는 점이었다. 6월 22일 독소전쟁이 시작된후 연일 격렬한 전투가 지속되면서 독일공군이 소련공군을 일방적으로 격파하고는 있었지만 독일공군기들의 피해상황도 가랑비에 옷이 젖는 것처럼 점점 쌓여갔으며 개전이후 3개월정도가 지난 9월 27일이 되자 전열에서 이탈한 항공기들의 숫자가 무려 2631기에 이르렀는데, 이중 1603기는 완전히 손실되었으며 1028기는 손상의 정도가 심하거나 수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해 전열에서 이탈한 상태였다.
이 수치는 무시할 수 없는 것으로 3개월전 바바로사 작전이 막 시작될무렵 독일공군이 침공을 위해 준비해놓았던 주요 작전기들의 숫자와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으며, 1년전 영국본토항공전이 가장 격렬했던 1940년 7-8월의 기간동안 독일공군이 스스로 인정한 손실이었던 1385기보다도 거의 두배에 가까운 엄청난 수치였던 것이다.
[ 전투 손상으로 불시착한 JG 53의 Bf 109F, 독일공군의 손실도 무시못할 정도가 되어가고 있었다. ]
이렇게 수적으로 불충분한 상태에서 독일공군이 담당해야할 지역이 너무 넓어지다보니 임무를 수행할 항공기들의 숫자가 너무나 부족한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이러다보니 심지어는 2기 편대 (로터)만으로 연대규모의 지상군의 상공을 순찰하고 작전을 원호해야 하는 경우까지도 있었으며, 이 조차도 교대 편대가 제때 출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최전선의 독일지상군 상공에 전투기의 공중엄호가 없는 경우도 빈번했다. 이럴 때 소련공군기들이 산발적으로 나타나는 경우 독일육군병사들은 몸을 숨기고 소련기들이 그들을 발견하지 못하기를 바라며 숨을 죽이고 있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이런 불길한 징후들은 연일 이어지는 전격전의 승전분위기에 도취된 히틀러와 수뇌부에 의해 계속 무시되고 있었으며, 이러는 사이에 계절은 어느덧 여름이 끝나가고 가을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무렵 독일군은 키에프 전투를 대 승전으로 마무리하고 이제는 모스크바를 공격목표로하여 또다시 전격전을 펼치려 하고 있었다. 히틀러에게는 그의 야망의 최종단계인 소련의 수도를 점령하는 순간이 며칠 안남은 듯 것으로 보였고, 모든것이 매우 낙관적인 상태였다.
* 모스크바를 노리는 강철의 태풍
키에프 포위전이 거의 마무리 되어갈 무렵 드디어 모스크바를 공격하라는 히틀러의 허가가 떨어졌다. 이른바 '태풍작전 (오퍼레이션 타이푼)'이 시작된 것이다. 1941년 9월 20일 드디어 공격이 개시되자 모스크바로의 진격에 목말라 하던 구데리안의 전차부대는 늘 그래왔듯이 스몰렌스크 남방에서 모스크바를 향해 질풍처럼 진군하며 거침없이 소련방어군을 격파하기 시작했다.
이 태풍작전을 상공에서 원호할 임무를 맡게된 제2 항공함대 (luftflotte 2)의 전력도 강화되었다. 북쪽의 레닌그라드 방면에서 작전하던 폰 리히토펜 휘하의 제 8 항공군단이 돌아왔으며 제 4 항공함대로부터 지상공격기부대도 지원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2 항공함대의 전력은 3개월전의 1200기에 비해서 절반도 안되는 549기로 크게 저하된 상태였으며 이중에서 지상군을 지원할 폭격기의 숫자는 불과 158기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에 맞설 소련공군의 상황도 매우 절망적이었으므로 이런 전력의 저하정도는 아직 심각하게 인식되지 못했다.
[ 모스크바를 향해 대초원을 질주하는 독일 장갑군, 이 때만해도 전쟁의 끝이 머지 않은 듯 했다. ]
9월말까지 독일군은 붉은군대를 완전히 지구상에서 쓸어 버릴 듯한 기세로 격파하는 듯 했다. 독일측의 전과집계에 의하면 이때까지 무려 250만명의 소련병사들을 포로로 잡았으며 19000대에 달하는 소련전차를 격파했고 30000여문의 야포를 파괴하거나 노획하였다. 독일공군은 개전이래 최전성기를 구가하며 14500기의 소련공군기를 격파하는 전공을 올렸으며 이중 5000기 정도를 공중전에서 격추시켰다.
10월초에는 모스크바를 향한 길목에 위치한 주요 전략 요충지였던 비야즈마와 브리얀스크에서 또다시 독일공군의 철저한 공중지원하에 북익과 남익으로 신속하게 전개한 전차부대에 의한 대규모 포위 섬멸전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으며 이번에도 소련군은 변변한 저항을 해보지 못한채로 허망하게 무너져 버렸으며, 결국 수많은 사상자와 포로를 남긴채 속수무책으로 붕괴되었다. 독일군의 발표에 의하면 이번의 포위섬멸전에서 무려 50만의 소련병사들이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 점령지의 마을에서 휴식중인 구데리안의 기갑부대 ]
사실 독일군이 우크라이나 남부의 키에프에서 전투에 집중하는 동안에 소련방어군에게 거의 한달 가까운 시간이 주어졌으므로 소련군의 전력도 많이 보강되었으며 개전초에 비해서 거세게 저항하고 있었으나 전술적인 면에서 경험이 부족하고 유연성이 없었던 소련군은 아직도 서부유럽전을 통해 백전의 전훈을 경험한 독일군의 전격전술에 거의 대응하지 못했다.
전체병력에서는 소련군이 더 많았지만 막상 전투가 시작되면 전투지역에대한 집중도는 단연 독일군이 압도적이었다. 대부분의 전투지역에서 독일 전차와 병사는 소련군보다 항상 2배정도 더 많았으며 항공기들은 거의 3배가 더 많은 숫자가 동원 되었던 것이다. 결국 분산 배치된 소련방어군은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집중력에서 밀리며 계속 무너졌고 결국 주요 거점을 속속 넘겨주고 있었던 것이다.
[ 용감하게 돌진중인 BT-5 전차부대, 그러나 백전의 강군 독일 기갑부대에게는 먹이에 불과했다. ]
예를 들어 브리얀스크 전선에서 80만의 소련군은 770대의 전차의 지원을 받으며 방어전에 임했지만 이 지역을 포위한 독일군은 생각보다 따른 속도로 병력을 증강하여 거의 2배에 가까운 150만의 병력을 집중시켰고 전차도 1100대가 동원되어 구식 소련전차들을 신속하게 제압한후 완벽한 포위섬멸전을 펼칠 수 있었다. 독일공군의 근접지원은 거의 완벽해서 독일지상군이 거센 저항을 만나면 어느샌가 구름을 뚫고 나타난 슈투카 급강하 폭격기들이 소련군의 방어거점에 치명타를 날려 구멍을 만들었으며, 이 상황을 틈타 독일 전차들이 구멍난 방어선을 뚫고 진입하여 완전히 붕괴시켜 버리는 매우 이상적인 공지 협동작전을 수행했다.
[ 브리얀스크와 비야즈마는 모스크바로 향한 마지막 관문이었다. ]
[ 브리얀스크, 비야즈마 포위전에서 포로가된 수많은 소련군병사들 ]
이제 모스크바는 그야말로 거대한 강철의 태풍의 직면하게 되었다. 궁지에 몰린 스탈린은 조국의 수도를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고 역설하며 휘하의 장군들을 독려했고, 모스크바시민들까지 총동원되어 참호를 파고 전차 방호벽을 설치하는등 모든 할 수 있는 것을 하도록 했지만, 연일 전선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절망적인 것이었고 전선 상공에서 소련정찰기들이 촬영한 독일지상군의 위세는 그야말로 대단한 것이었다.
10월 5일 정찰임무에서 돌아온 한 소련 정찰기 조종사는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되어 상관에게 정찰결과를 보고했다. 그는 스몰렌스크에서 모스크바에 이르는 모든 주요 도로에는 독일 전차들과 지상병력으로 가득차있으며 이제는 절망적이라고 소리를 질러댔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NKVD (소련비밀경찰)에 의하여 패배주의자로 몰려 즉시 총살되었다.
[ 근접지원 임무를 수행중인 Ju 87 슈투카 편대 ]
[ 슈투카에 의해 파괴되는 모스크바 남서부의 요충지 오카강의 교량 ]
이렇듯 대부분의 소련군병사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상태가 되었다. 그들앞으로 점점 다가오는 이 강력한 강철의 태풍은 도저히 막을 수 없을 것 같았으며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이 올라있는 동부전선의 독일군 병사들에게는 모스크바로 가는 길이 활짝 열린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 진흙장군 독일군의 발목을 잡다.
히틀러와 독일 수뇌부는 거침없는 진격을 거듭하는 그들의 군대의 상황이 그려진 지도를 보면서 10월중에는 모스크바 점령을 완료하여 바바로사 작전의 마지막 단계를 마무리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10월 8일이 되면서 거칠 것 없이 진격하던 독일군 앞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가 발생했다. 갑자기 전에 보지 못했던 큰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 비가 내리기 시작했을 때 독일병사들은 롤반의 흙먼지를 없애줄 것 이라며 좋아했었지만, 그건 순전히 착각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 번에 내리는 비는 아무리 기다려도 그칠생각을 하지 않았으며 전장의 상황을 일순간에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비가 시작된후 단 하루만에 소련의 롤반 (초원의 엉성한 길)들은 사람의 허벅지까지 빠져들 정도의 진흙의 바다로 변해 버린 것이다. 이렇게 되자 독일군 전체가 곤경에 처했으며 상상도 하지 못했던 진흙의 수렁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 소련의 가을우기와 함께 찾아온 진흙 수렁에 빠져든 차량 ]
더구나 이것은 매년 늦가을에 약 2주이상의 기간동안 많은 강우량을 특징으로 하는 소련의 가을장마의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 가을장마가 시작되면서 등장한 진흙 장군이 독일군의 쾌속진격을 완전히 저지하게 된 것이다. 매일 하루 60-80km의 거리를 주파하며 거칠 것 없이 진격하던 독일육군의 진격속도는 1/10도 안될정도로 뚝 떨어졌으며 대부분의 부대가 헛되이 연료만을 소모하면서 진흙속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특히 소련침공전의 주역인 독일 중부집단군은 10월말까지 모스크바를 불과 80km정도 남겨둔 상태에서 완전히 진흙 장군에게 발목을 잡힌 것이다.
말이 끄는 무거운 대포는 그대로 진흙의 수렁속으로 빨려들어가 완전히 멈추어서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애물단지 신세가 되 버렸고 그동안 전격전의 주역이던 기갑차량들조차도 진창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병사들은 허벅지까지 빠져드는 진흙속에 발이 묶이고 걸음만 옮기려고 해도 장화가 벗겨지는 수난을 당했다. 야영을 하려고 해도 야전텐트를 설치할 만한 마른 땅을 찾지 못해 제대로 휴식을 취할 수도 없었으며 전투는 커녕 자기몸을 뜻대로 움직이기조차 쉽지 않았던 것이다.
몇몇 전차들이 간신히 진흙탕을 헤치고 전진해 나아간다해도 그건 아무소용이 없었다. 그들을 지원할 보병들은 아직도 저멀리 후방에서 진흙에 갖혀 오도가도 못하는 상태였으며 무한궤도가 없는 트럭, 수레와 같은 보급차량들은 한번 진흙에빠지면 기동불능 상태가 되어 전혀 그들을 따라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 오도 가도 못하게된 차량들, 마필과 보병들조차도 간신히 움직일 수 있을 정도였다. ]
게다가 한숨돌린 소련군의 저항이 이전에 비해 신경이 쓰일정도로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모스크바 전선의 소련육군병사들의 저항이 이전과는 달리 점점 조직적인 모습을 갖춰가는 것이 독일 지휘관들에게 느껴질 정도였으며, 특히 점점 자주 모습을 나타내는 신형 전차 T-34전차의 우수한 성능은 구데리안조차 신경이 날카로워질 정도였다. 게다가 하늘에는 소련공군의 신형 전투기들과 지상공격기, 폭격기들의 출현빈도가 늘어나고 있었는데 이중에서 특히 야크-1 전투기의 성능은 기존의 소련전투기들을 훨씬 능가하고 있어서 독일공군이 무시하지 못할 정도였다. 게다가 튼튼한 장갑과 강력한 무장으로 상당히 잠재력이 있는 소련의 신형 지상공격기 Il-2 슈트로모빅같은 기체도 독일지상군에게 상당한 위협이 되었다.
물론 아직까지는 지상과 하늘에서 경험많은 독일군 전차와 전투기들이 이들을 제압하고 전세를 주도하고는 있었으나 만약 대량으로 출현하게 된다면 쉽게 승리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만은 없는 충분한 위험신호였다.
[ 진흙투성이가 된 활주로에서 작전 불능에 빠진 JG 51의 Bf 109F ]
10월 초까지 태풍작전을 상공에서 완벽하게 지원하며 맹활약하여 하루 1000회 이상의 출격회수를 기록할 정도로 활발하게 활동하며 지상군을 지원하던 독일공군기들도 기상이 악화되면서 갑자기 활동량이 뚝 떨어져 버렸다. 독일공군기들의 최전방 거점인 주요 비행장들의 활주로들이 순식간에 엉망이 되고 만 것이다. 대부분의 활주로에서 잔디가 완전히 물을 먹어 억세지고 여기저기가 물에 잠겨 진흙탕이 되버리면서 항공기들의 강착장치에 과부하가 걸려 고장을 일으킬 우려가 커지면서 항공작전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이다.
비가내리기 시작한지 이틀째인 10월 9일에는 전 독일공군기들이 겨우 300회의 출격횟수만을 기록했을 정도로 전투력이 뚝 떨어져 버렸다. 더구나 간신히 하늘로 날아오른다고 하더라도, 계속 내리는 비와 낮게 깔린 안개로 인해 시계가 매우 불량하여 공격목표의 탐지에 어려움을 겪었다. 사실 조종사들에게는 이런 악천후에 비행을 시도 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위험한 것이었다.
[ 불량한 활주로에서 착륙사고를 일으킨 슈투카, 조종사도 사망하고 말았다. ]
결국 전장은 가을과 함께 찾아온 장마비에 의해 소강상태에 빠져들었으며 절망적인 상태에서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졌던 소련군은 가뭄속의 단비와 같은 우기가 데려온 진흙장군의 지원 덕분에 한숨 돌리게 되었다.
독일군에게 닥친 진흙의 시련은 앞으로 그들이 겪게될 지옥과 같은 상황의 전주곡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들이 진흙속에서 허우적대며 한달여의 시간을 소비하며 허우적대는 사이에 북쪽에서부터 찬공기가 빠른 속도로 남하하고 있었다. 이제 곧 독일군 전체를 생지옥으로 몰아넣게 될 더욱 강력한 적수가 비구름의 틈사이로 서서히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