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4 : 얼어붙은 동부전선

◇ Side Story : 크로아티아 공군의 활약

(Croatian Wings)

         This document was updated at 2008. 1. 1

 

foxmouse : 2008년의 첫 번재 업데이트는 객원필진 정현재님의 글로 시작합니다. 역시 독소전 항공전의 숨은 이야기 하나를 찾아서 보내주셨네요. 독소전에 참가했던 크로아티아 공군의 이야기입니다. 자료를 보내주신지 2주가 다 되어가는데, 홈지기가 요새 정신없이 지내다보니 이제서야 업데이트 진행합니다. 늘 좋은 글 보내주시는 정현재님을 비롯한 객원필진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P.S) 정현재님은 2월 25일 카투사로 입영 예정이라는데 부디 몸 건강히 국방의 의무를 마치기를 바랍니다.


안녕하세요 정현재입니다. 중간고사를 마치고 이제야 여유를 갖게 되었습니다. 불타는하늘에 이제 10번째 기고를 하게 되는 군요. 이거 10회 특집이라도 올려야겠지만;; 이번에는 시험 마치고 몸도 풀겸(?) 크로아티아 공군의 활약상을 짤막하게 기고하게 되었습니다. 크로아티아.. 저는 이 나라의 존재를 98년 프랑스 월드컵때야 알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제가 소장하고 있는 In The Skies of Europe이 요긴하게 쓰이는군요. 볼 때마다 정말 잘샀다는 생각이 드는 책입니다. 2차대전 동유럽 여러국가에 대한 역사적 기본 지식이 워낙 부족했었던지라 백과사전과 위키피디아등 많은 자료를 참고하였습니다.

 

Side Story - 크로아티아 공군의 활약

 

어지러운 유고 슬라비아와 괴뢰국 NDH의 탄생

1941년, 유고슬라비아는 점점 커져가는 추축 세력들에 대해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1934년 유고 슬라비아의 알렉산더 1세가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암살당한뒤로 조카인 어린 국왕 폴 2세를 대신에 나라를 맡아 섭정을 계속해온 Paul 왕자는 나라의 안위를 위해 추축국과의 동맹이 절실하다고 판단, 1941년 3월 25일, 비엔나에서 삼국동맹(원래는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동맹국이었지만, 추축세력의 위협을 느낀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슬로바키아등이 차례로 가입하게 된다)에 가입하게 된다. 사실 히틀러는 세르비아 인구가 다수인 유고슬라비아를 과연 동맹에 가입시킬 수 있을지 스스로도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의 Paul 왕자의 협조는 그에게 때아닌 희소식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유고슬라비아 내의 일이었다. 이 일로 인해, 수도인 베오그라드에서는 격렬한 시위가 전개 되었으며, 동맹 가입 서명의 잉크가 채마르기도 전인 3월 27일에 피터 2세는 영국군의 지원을 받은 친영 장교 그룹과 정치인들과 함께 쿠데타를 감행, 성공하여 권력을 탈취하였다.(사실 본래 왕이었던 폴 2세가 자기 권력을 자기가 쟁취한 것이라 단어 선택에 많은 고민을 했다. 하지만 일단 비정상적인 과정으로 권력을 잡은 것이기 때문에 '쿠데타'와 '탈취'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피터 2세와 새 정부는 당연히 반독일체제로 가고자 하였고, 잠시동안이었지만 사실상 추축동맹의 세력권밖에 있게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히틀러의 눈밖에 나게 된 유고슬라비아는 독일군이 쳐들어오지 않을까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을 도와줄 영국군은 유고슬라비아로 투입할 여유 병력이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우려했던데로 독일군이 침공해오자, 피터 2세는 정부 인사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해외에 망명정부를 세우고 연합국에 지원을 요청하기로 결심하였다.

[ 아돌프 히틀러와 Paul 왕자. 셀 수 없을정도로 많은 메달을 달고 있는 것이 보인다. 소련군 장성들 사진에서 본 것보다도 더 많아보인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유고슬라비아의 동맹 가입의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는지, 히틀러의 얼굴에 미소가 보이는 듯 하다. 왕자는 권력을 빼앗긴 뒤, 영국군에 의해 남아프리카의 저택에 연금된 채로 종전까지 생활하게 된다. 하지만 필자는 이 연금생활이 오히려 Paul왕자에게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었을까하고 생각한다. 그가 만약 유고슬라비아에 남겨져 독일군에 해방되었다면, 이름뿐인 꼭두각시 나라의 왕으로 추대받을 공산이 있으며, 패전 후 파르티잔에게 어떠한 일을 당했을려는지도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

1941년 4월 6일, 독일이 유고슬라비아 침공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독일 육군이 닿기도 전이었던 10일에, 이미 자그레브(오늘날 크로아티아의 수도)에서는 새 크로아티아의 독립이 선언되었다. 그리하여, 크로아티아 독립국(Nezavisna Drzava Hrvatska, NDH)이 세워졌다. 그 당시의 크로아티아의 위치와 영토 규모는 오늘날 크로아티아의 그것과 거의 비슷하였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전영역과 슬로베니아와 세르비아의 영토도 약간 포함한 크기였다. NDH 건국은 유고슬라비아내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이 결성한 정당이었던 Ustaše(일종의 크로아티아 파시스트)가 주도한 것이었다. NDH 건국 초기 Ustaše 당원들은 12,000명도 되지 않는 적은 수였기 때문에, 무장을 시킨다고 해도 크로아티아 영토를 경비하고 방어하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한 숫자였다. 그래서 독일군이 북동쪽에 주둔하였고, 이탈리아군이 남서쪽에 주둔하여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말이 독립국이었지만, 2차세계대전 독일에 점령하에 있었던 다른 여러 유럽 나라들에 세워진 정부처럼, 크로아티아에 세워진 정부도 나치의 손에 놀아나는 괴뢰정부에 지나지 않았다.

Ante Pavelić 별명 '발칸인들의 도살자'(1889-1959 : NDH 초대 Poglavnik(총통인 Fuhrer와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Ustaše창단 멤버였으며, 종전후 오스트리아, 로마, 남아메리카 아르헨티나로 전전하며 망명생활을 한다. 아르헨티나 대통령 후안 페론의 보안 고문이 되어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크로아티아인 약 34,000명에 비자를 발급하게 하였다.)

Ante Pavelić의 명령하에 이 극단주의자들은 NDH 건국 초기부터 세르비아인들을 몰아내려는 잔학행위를 서슴지 않았으며, 그 결과 세르비아인 파르티잔 운동이 벌떼처럼일어나게 되었다. NDH의 간부였던 Mile Budak(1889-1945)이 만든 무시무시한 '대축출'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되었다.

 

 "우리는 크로아티아의 모든 세르비아인, 유대인, 그리고 집시들에게 사용할 300만발의 총알이 있다. 우리는 우선 세르비아인 3분의 1을 죽일 것이며, 다른 3분의 1은 추방할 것이며, 남은 3분의 1은 카톨릭으로 개종시킬 것이다."       

-1941년 7월 22일 Gospić에서의 연설중에 -

이러한 잔혹한 정책은 1945년까지 약 4년간의 내전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NDH는 잠시도 국가내의 안정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크로아티아 공군의 탄생

크로아티아 공군 (Zrakoplovstvo NDH)은 4월 19일, 독립이 선포된지 단 9일만에 역사속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지휘관은 블라디미르 크렌 대령이었으며, 왕실 유고슬라비아 공군 전직 대위였다. 그는 4월 4일 Graz로 탈영하였고, 자신을 열렬한 Ustaše 지원자로 내세웠다. 대부분이 왕실공군 출신으로 이루어진 새 공군의 첫 번째 임무는, 실전에 사용할 각종 군용기를 모으는 것이었다. 유고슬라비아와 추축군간의 교전에서 살아남았거나, 종전후 이탈리아군이나 독일군에 의해 압수되지 않고 용케 남은 잔여 기체들이 대상이었다.

쓸 만한 기체들을 모으는 동안, 크로아티아 공군은 인력을 동원하여 자그레브와 사라예보등 주요 비행장들을 손질하고 재가동 작업에 들어갔다. 자그레브는 1. Zrakoplovna(제 1 공군 기지)로 명명되었으며, 사라예보는 제 2 공군기지가 되었다.

비행대 단위 용어 (단위당 배치 기체수는 각 나라마다 다름)

미국

독일

크로아티아

Groupe

Gruppe

Skupina

Squadron

Staffel

Jato

1941년 7월, 독일은 자그레브에 FFS A/B 123(기초 비행 훈련 학교)라는 비행 학교를 세워 크로아티아 공군 조종사들을 양성하기 위한 트레이닝 과정을 시작하였다. 전투기 그룹 4. Skupina(10. Jato와 11. Jato)와 폭격기 그룹 5. Skupina(12. Jato와 13.Jato)가 7월에 새로이 결성되었다.

 

독일 공군내의 크로아티아인 비행대

1941년 6월 22일, 마침내 독소전이 발발하자, Ante Pavelić는 그의 상전인 히틀러에게 7월 1일 편지를 썻다. 그 편지의 내용은 크로아티아에서 독일 육·해·공군에 자원할 병사들을 모집하여 보내겠다는 제안이 담겨 있었다. 단지 이데올로기적 이유만이 아니라, 독일의 편에 붙어서 전쟁을 치룸으로서 이탈리아의 간섭을 피해 보겠다는 기대에서 이런 제안을 하게 된 것이었다.

이 이야기에서 주로 다룰 내용은 아니지만 크로아티아도 다른 나라들 처럼 육군 병력을 독일군에 제공했고, SS 무장 친위대 사단도 2개가 있었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내의 크로아티아인 부대(육군)

- 제 369, 373, 392 보병 사단

- 5개 Polizei-Freiwilligen-Regiment(자원 경찰 연대)

- 제 13 SS 무장 친위대 Gebirgs(산악) 사단 'Handschar'

- 제 23 SS 무장 친위대 Gebirgs(산악) 사단 'Kama' (인원 부족으로 편성 실패)

[ Handschar SS 사단의 마크 ]

 

그리하여 제 10, 11 전투기 Jato와 제 12, 13 폭격기 Jato가 크로아티아 루프트바펜-군단(Kroatische Luftwaffen Legion)을 결성하였고, 300명의 조종사들이 트레이닝을 위해 독일로 갔다. 대부분의 조종사들은 유고 슬라비아 왕실 공군의 현역 혹은 예비역 조종사였고, 그들 중 일부는 Bf 109E나 호커 허리케인등의 기체에 대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훈련의 가속화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1941년 10월에 동부전선의 독일 공군에 배치 될 수 있었는데, 폭격기 조종사들은 비텝스크(Vitebsk : 지금의 벨로루시에 위치)등지에 있던 KG 3(2개 Jato는 각각 10, 15./KG 3이 된다)에서 Do 17Z를 조종하게 되었다. 1942년 1월 6일의 독일군 OKW 보고서에는 이들 크로아티아 폭격기 부대에 대한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었다.

"크로아티아인 편대는 겁 없는 저공 지상 공격으로 전장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런 저돌적인 공격은 따르는 희생도 만만찮은 것이었다. 1월까지 총 6기의 기체와 4명의 조종사를 잃었으며, 그중에는 전대장 Graovac대위도 끼어있었다. 370회의 비행 출격으로 지상에 주기한 13기의 적기 파괴등 많은 공훈을 세운 KG 3의 크로아티아 2개 전대는 전선에서 물러나 크로아티아로 돌아오게 된다. 잠시의 휴식기간뒤, 이들은 파르티잔 진압을 위한 임무를 맡게 되었다. 1942년 6월, 또 다른 무리의 크로아티아 조종사들이 이번에는 KG 53 'Legion Condor'부대(15./KG 53)에 배속되어 13기의 Do 17Z 폭격기들을 배치받아 날아올랐다.

1942년 11월, 파르티잔의 게릴라전에 시달리던 Ante Pavelić의 간절한 요청에 의해 전대원들은 모두 크로아티아로 돌아왔고, 다시는 독일공군에 조종사 그룹을 보내지 않게 되었다. 이들은 국내의 무장한 폭동세력 공격에 투입되거나, 아드리아해 부근의 정찰 임무를 맡았다.

한편, 독일로 갔던 제 10, 11. Jato 소속의 전투기 조종사들은 훈련을 마치고 1941년 10월, 아조프해에 주둔하고 있었던 동부 전선의 명문 비행단인 JG 52에 배속되었다(이중 11. Jato는 기체 부족으로 10. Jato에 흡수된다). Bf 109E형을 받은 이 전대는 비행 임무 빈도가 낮은 1941년/42년 겨울을 보내고, 봄이 오자 왕성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4월까지 총 30기의 공중전 승리를 기록하였고, 대장이었던 프란조 Džal의 이름을 따 'Džal 전투기 그룹'으로 불리웠다. 독일공군내의 크로아티아인들은 다른 여러 나라에서 온 자원자들처럼 독일 군복을 입었으나, Ustaše의 마크인 U가 그려진 뱃지를 달아 크로아티아인임을 표시했다. 그들은 그들이 몰던 Bf 109기체에도 붉은색/흰색 체크무늬 위에 큰 U자가 그려진 마킹을 동체 칵핏 아래에 그려넣었다.

15.(kroat.)/JG 52는 우리에게는 유명한 2차세계대전 독일군의 명장중의 명장,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세바스토폴 공격(우크라이나 크림반도 남서부의 도시 - 7월 1일에야 독일 제 11군에 의하여 점령되었다)에도 잠시 참가하였다. 노후한 Bf 109E를 타고 싸워야 하는 것이 불만족 스러웠던 크로아티아 조종사들은 그들의 독일 주재 대사관 공군 무관이었던 마리안 돌렌스키 대령을 통해, 베를린에 신형 전투기를 보내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들의 요청이 헛되지 않아, 7월 초, 그들이 바라고 바라던 새 전투기, Bf 109G-2 전투기(9월에야 모든 전투기들이 이 전투기로 교체 되게 된다) 7대를 받게 되었다. 6월 21일 까지 전대는 이미 1,000회의 출격 횟수를 넘어섰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 최고 사령부는 Džal 전투기 그룹의 50번째 격추를 보고서에 언급하였다.

독일공군과 독일공군 내 크로아티아 공군 부대원들간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독일군은 크로아티아 군인들을 용감하고 언제든지 출격이 가능한 믿음직스러운 동료로 생각했다.

"한번은 소련 지상공격기들이 저공으로 날아와 비행장에 기총소사를 가한적이 있었다. 언제 기총에 벌집이 될지 모르는 상황속에서도 크로아티아 지상정비요원들은 조종사들이 날아올라 요격할 수 있도록 전투기에 올라가 수리를 하고 있었다."

- 한 독일군 병사의 회고 -

그때까지도 적에게 비행기를 몰고 귀순을 한 조종사는 Bf 109E를 타고 소련군으로 도망한 한 중위 말고는 없었다. Džal그룹은 10월에 새로온 조종사들을 맞이하였고, 11월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까지 15.(kroat.)/JG 52는 164기의 적기 격추를 기록했다.

[ 출격! 15.(kroat.)/JG 52의 메서슈미트기가 출격준비를 하고 있다. 조종석에는 Džal 그룹의 비행대장 프란조 Džal이 앉아있다. 그는 대전후 파르티잔에 잡혀 처형당하고 만다. ]

잠시 고국으로 돌아온 부대원들은 하나같이 고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내전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처절한 내전속에서 크로아티아 정부는 독일군의 도움이 없이는 도저히 국가 안보를 확립할 수가 없었다. 돌아온 부대원들 중 일부는 이시기에 파르티잔과 접촉하게 되었고, 다시 전선에 복귀하여 케르치(우크라이나 남부의 도시)에 배치 된 1943년 3월에는 이미 기회만 있으면 소련군에게 도망가려고 계획까지 다 짜놓은 조종사들도 몇몇 있었다. 이들은 도망갈 때를 기다렸고, 기회는 머지 않아 찾아왔다.

4월과 5월 사이에 크로아티아인 전대는 쿠반의 독일군 교두보 지역에서 작전하며 71출격에 12기 격추를 기록하였으며, 4기 피격추를 기록하였다. 3월 말에 소위 한명이 그의 Bf 109G-2를 타고 행방불명이 되었는데, 교전 중 격추에 의한 행방불명이 아니라 소련군으로 달아난 것으로 추정되었다. 출격 수와 격추 대수가 늘어나면서 아군기의 손실도 조금씩 늘어갔다. 하지만 단순한 기체 손실 보다도 더 큰 타격을 준 것은 인적 손실이었다. 그것도 교전중 전사가 아니라 소련군으로의 도주가 큰 골칫 거리였다. 5월 14일, 조종사 2명이 모의하여 각기 애기를 몰고 도주 하였고, 6월 15일에 또 1명이 더 자신의 Bf 109G-2를 몰고 소련군으로 날아가 버렸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독일군의 크로아티아인 부대에 대한 신뢰는 급속히 떨어졌고, 결국 5일뒤에는 전대에 출격 금지령이 떨어졌다. 이는 크로아티아인들에게 이러한 조치는 출격 기회의 박탈은 둘째 치더라도 대단히 불명예 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부대원이 5명이나 아군기를 몰고(그것도 퇴물 취급을 받는 Bf 109 E형이 아닌 G형 전투기) 적진으로 도주한 것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신뢰를 잃은' 부대는 결국 전선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 크로아티아 전투비행대의 장교들이 근심어린 표정으로 모여있다. 맨 왼쪽이 프란조 Džal이다. ]

크로아티아 공군의 총사령관이었던 크렌 장군은 이러한 불미스러운 일에 대한 책임을 물어 전대장이자 Džal 전투기 그룹의 대장 프란조 Džal을 해임했다. 하지만 그의 인사결정은 가뜩이나 냉각된 크로아티아-독일 공군사이의 관계를 독일공군 인사들과 그나마 친밀한 사이였던 Džal을 해임시킴으로서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결국 크렌은 잘못된 인사에 대한 책임을 지고 스스로 물러나게 되었고, 그의 뒤를 이어 Adalbert Rogulja 대령이 크로아티아 공군 수장이 되었다. 대령은 곧바로 Džal을 복귀 시키고 1계급 승진을 시켰다.

크로아티아와 독일 공군은 모두 15.(kroat.)/JG 52에 속한 대부분의 기간 조종사들에게 믿음을 잃었고, 훈련을 마친 새로운 조종사들로 완전히 교체하여 전대내 분위기를 쇄신하고자 하였다. 새 조종사들은 대부분 자그레브의 독일 비행학교에서 훈련을 마치고 심화 과정을 거치기 위해 JG 104에서가서 훈련을 받기도 하였다. 9월 10일 훈련을 마친 그들은 한달뒤 Bf 109G-4와 G-6 전투기들을 받아 케르치 반도 부근에서 실전 배치를 완료 하였다. 이번에 그들을 맡아 지휘한 이는 2차세계대전중 크로아티아 공군 격추 1위의 Mato Dukovač 대위(40기 격추)였다.

크로아티아 조종사들은 갈수록 숫적으로나, 질적으로나 감당하기 버거워지는 소련 공군에 맞서서 비행을 계속 하였다. 숫적인 열세 속에서 고군분투를 하였지만, 1944년 2월, 크림 반도 부근의 Karankut로 기지를 옮겼을 시점에 남은 전투기는 고작 4기 뿐이었다. 결국 한달뒤인 3월에 다시 고국인 크로아티아로 돌아와 휴식과 함께 재정비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1943년 10월부터 전대는 51기의 공인 격추와 10기의 비공인 격추를 기록하였고 5명의 조종사를 잃었다고 한다. 대전중 모든 크로아티아 공군 조종사들이 15.(kroat.)/JG 52에 소속되어 비행을 한 것은 아니었고, 이때 막 JG 104와  또다른 비행 훈련 부대인 Erg.JG 1(Ergänzungs-Jagdgeschwader 1)에서 훈련을 마친 어린 조종사들은 JG 52의 독일 공군 직속 부대에 바로 배속되어 독일군 조종사들과 함께 날아올랐다.

1944년 6월 중순에 다시 제 15 전대로 돌아와 동부전선에 투입되었지만, 루마니아의 비행기지에서 받기로 약속한 Bf 109G-10과 G-14형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동프러시아의 기지로 이전한 이 부대는 독일 공군에 의해 JG 52에서 독립하여 1. kroatische Jagdstaffle(크로아티아 제 1 전투기 전대 - 당시 소속은 독일 제 6항공군 예하 제 1 전투기 사단이었다)라는 이름하에 다시 날아오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상황은 너무나도 절망적이었다. 막 이름을 바꾸고 약속한 새 전투기들을 받을 동안에도 지상의 독일군은 도처에서 패퇴하고 있었고, 간신히 만든 방어선도 소련군 특유의 막강한 포대 화력에 의해 빈사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으면, 숫적은 물론 질적으로도 독일군의 중전차(독일군 판터나 티거 전차)들과 호각지세를 이루는 소련군 신형 전차들이 수도없이 밀려들어왔다.

간신히 독일 신형 전투기를 받아내는데 성공하고 가망없는 상황속에서 조금이나마 희망을 가져보려고 했던 크로아티아 조종사들의 기를 한번에 꺾어 버린 일이 생기고야 말았으니, 소련군으로 2명의 조종사가 전투기를 타고 또 도주한 것이었다. 문제는 그들 중 하나가 바로 그들의 전대장이자 크로아티아 공군 내 격추 랭크 1위였던 Mato Dukovač의 탈주였다. 지상의 절망적인 전황속에서 혼란스러운 크로아티아 부대원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어야할 전대장의 도주는 부대원들의 사기를 땅에 떨어뜨림과 동시에, 전에도 부대원의 도주로 크로아티아인 부대에 대한 신뢰를 이미 잃은적이 있었던 독일공군도 그대로 묵과할 수 는 없는일이었다. 그리하여, 독일공군은 다시 크로아티아인 전투기 부대에 출격 금지령을 내렸고, 이로서 독일공군내 크로아티아 전투기 부대의 활동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비록 불명예스러운 결말이었지만, 독일 공군에 소속되었던 크로아티아 전투기 조종사들이 거둔 성과 만큼은 대단한 것이었다. 1941년에만 이 전대의 조종사들은 259기의 적기 격추를 달성하며 독일 공군 수뇌부를 흐뭇하게 하였던 것이다.

 

크로아티아 공군 - 영공을 지켜라!

물론 크로아티아 조종사들이 독일 공군 예하 부대에서 전대급 부대로 소속되어 활약을 한 것만은 아니다. 많은 조종사들이 내전에 휩싸인 조국의 평안을 위해 크로아티아 공군 소속으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2차세계대전 당시 본국의 영공을 지키기 위해 크로아티아 공군은 거의 70종이나 되는 군용기를 운용하고 있었다. 1941년 6월, 독일군은 다양한 종류의 기체를 크로아티아 공군에 넘기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유고슬라비아 왕실 공군의 잔여기체들이었다. 기체들 중에는 5기의 브리스톨 블렌하임 폭격기, 5기의 뽀떼 25(프랑스의 복좌 단발 복엽기. 폭격기능이 있었으며 전투 폭격기나 정찰용, 폭격기 호위용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복엽기등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체들은 크로아티아 내의 비행기 생산 시설에서 먼저 정비를 해야했고, 실전배치는 늦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1941년 말의 크로아티아 공군 상황을 보면, 4개의 그룹 12개 전대에 총 95기의 전투기들이 배치되어있었고, 그나마 실전 투입 가능한 기체수는 50%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 파르티잔 진압에 사용되었던 Potez 25. 비록 구닫다리 복엽기로 보이긴 하지만 지상공격용으로 크로아티아 조종사들에게 선호되었던 기체이다. 유고슬라비아 왕실 공군이 프랑스로부터 매입하였다. ]

 

[ Breguet 19. 유고슬라비아가 1924년 100대의 기체를 매입하였고, 1927년에는 생산 라이센스를 받아 자국에서 양산을 시작하였다. 뽀떼 25 처럼 복좌식 복엽기였다. 이 기체 또한 파르티잔 진압에 요긴하게 쓰였다. ]

긴박하게 돌아가는 국내 상황 때문에, 들여오는 가용 기체는 최대한 빨리 비행대에 배치하여 파르티잔 진압에 사용되었다. 유고슬라비아가 프랑스에서 매입했었던 Potez 25와 Breguet 19기들이 가장 이 임무에 적합하다고 판단되었는데, 이 두 기종은 각각 200kg, 400kg의 폭탄을 적재할 수 있었다. 이 경폭격기들은 지상공격 뿐만이 아니라 파르티잔에 포위된 국내의 군사 요새와 기지등에 식량과 탄약등 물자를 보급하는데에도 긴히 사용되었다. 여기서 그 당시 크로아티아내의 파르티잔 활동이 Pavelić이하 친나치 크로아티아 정부에 얼마나 큰 위협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1942년, 크로아티아 공군은 기체를 가능한한 현대화 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결과 신예는 아니지만 이탈리아의 카프로니 Ca 311M폭격기 10기, F.L.3 훈련기 10기 Fiat G.50 전투기 10기(훈련용 2인승기 한기 포함)등을 구입하여 양적, 질적으로 약간이나마 향상된 전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독일로 부터는 6기의 Do 17E 폭격기를 받았고, 1935년 유고슬라비아가 도르니에로부터 생산 라이센스를 취득하여 생산한 Do 17K 11기를 받았다.

[ 유고슬라비아 왕실 공군 소속 Do 17K. 유고슬라비아는 4월 전쟁(독일의 유고슬라비아 침공) 당시 60여기의 기체를 2개 폭격기 그룹에 나누어 보유하고 있었다. 침공이 시작되자, 대부분의 기체는 날아보지도 못하고 지상에서 대파 되었으며, 4기가 작전중 격추되었다. 우세한 독일군에 대항해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피터 2세가 측근들과 왕실 보유 재산의 일부와 함께 그리스로 도피했을 때에 이 도르니에기에 탑승하였다고 한다. 거의가 성능이 더 좋은 Gnome-Rhône 14N 공랭식 엔진 2기를 탑재하고 있었으며, 무장 면에서도 히스파노 수이자 20mm 기관포 1정, 브라우닝 기관총 3정등 독일공군의 도르니에 폭격기 초기형 보다 뛰어났다. ]

또한, 9기의 종류가 다른 포커기들이 당시 독일의 보호령 아래 있었던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등지에서 전달되었고, 국내의 Zemun 공장에서 생산된 기체까지 더하여 1943년 말까지 크로아티아 공군이 격납고에 들인 기체는 98기에 달하였다. 물론 한 나라의 영공을 지키고 지상군을 지원하기에는 너무나도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지만, 크로아티아 공군 수뇌부에서는 이 정도 전력을 갖춘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1942년 말 크로아티아 공군의 전력은 14개 전대에 160대의 각종 전투기, 폭격기가 배치되어있었다.

이러한 전력의 증가에 힘입어 크로아티아 공군은 새로운 부대를 계속 창설 할 수 있게 되었고, 1942년 말의 크로아티아 공군 작전 부대는 다음과 같았다.

 

부대

주둔 비행장

제 1 그룹 (제 1, 2, 3, 19 전대)

제 2 그룹 (제 4, 5, 6 전대)

제 3 그룹 (제 7, 8, 9 전대)

제 6 그룹 (제 13, 16, 17, 18 전대)

자그레브

Rajlovac

Rajlovac

바냐루카

 

 1943년 1월 15일, 추축국 군대는 보스니아 남동쪽에서 할거하고 있는 티토의 파르티잔 부대에 전격적인 공격을 시작하였다. 크로아티아 공군도 근접 지상 지원을 위해 작전을 짜 놓은 상태였지만, 기상 악화로 인해 2월까지는 출격도 할 수 없게 되었다. 3월이 되어서야 250여회의 출격을 할 수 있었다. 4월 20일에는, 보스니아 중앙 지역의 파르티잔을 진압 하기 위해 독일군, 이탈리아군, 크로아티아군과 세르비아 체트닉 무장 군인들이 투입되었다. 공군은 4월에 350회, 5월에 325회의 출격을 하여 이들의 작전을 도왔다. 하지만 크로아티아 공군이 직접적으로 지상 공격을 감행한 횟수는 총 출격 횟수의 3분의 1에 지나지 않았고 정찰이나 보급, 또는 파르티잔에게 항복을 회유하는 내용의 삐라를 뿌리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1942년 1년동안 4,800회의 출격중 30퍼센트 정도만이 직접 공격을 위한 것이었다.

5월 23일, 한기의 Breguet 19와 또 한기의 Potez 25가 탈영하여 파르티잔에 투항을 했고, 또 6월과 8월에는 2기의 블렌하임 폭격기가 중립국 터키로 달아나 버렸다. 15.(kroat.)/JG 52의 예에서 보여주었듯이 이러한 사건들은 남은 크로아티아 조종사와 지상요원들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많은 조종사들이 잔혹한 내전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했고, 몇몇 폭격기 조종사들은 일부러 목표물이 아닌 곳에 가서 폭탄을 버리고 오는 경우도 허다했다.

크로아티아 정부로서는 뭔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국방성에서 주어진 작전을 제대로 정확히 수행하라는 명령을 발표하는 것 밖에는 별 도리가 없었다.

이러는 와중에도 내전은 점점 치열해지고 공격 방법도 잔인하게 변하고 있었다. 7월 2일, 크로아티아 공군기들이 내전 발발 후 처음으로 화학전을 위한 폭탄을 투하하였다. 최루가스가 포함된 폭탄을 파르티잔이 활동하는 마을위에 떨어뜨린 것이었다.

비록 1942년 유고슬라비아의 상공은 추축군 항공기들이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지만, 크로아티아 공군만 내전을 치루며 35기의 기체를 손실한다. 이중 19기는 파르티잔의 기습공격에 의해 지상에서 파괴되었고, 4기 도주, 12기는 사고로 전력에서 제외되었다.

1943년 1월 20일, 추축군은 또 한번 파르티잔 진압 작전을 실행에 옮긴다. Unternehmen Weiss(작전명 White)라고 알려진 이 작전은 종전의 파르티잔 진압 작전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강한 공군력을 등에 업고 시작되었다. 이 작전에는 독일공군 3개 전대 이탈리아 공군 7개 전대, 크로아티아 공군 4개 전대가 참가하여, 총 150대의 전력이 투입되었다. 독일군 3개 전대 중에는 동부전선에서 물러나 아직 해산 되기전이었던 15./KG 53 크로아티아 전대도 있었다. 이러한 공군력의 투입에도 불구하고, 2월 18일 작전이 끝날 시점의 티토 군은 간신히 포위를 피하고 도망 치기는 했지만 아직 건재 했다. 크로아티아 공군은 이 작전에서 고작 97회의 출격을 기록했을 뿐이었다. 곧바로 이어진 Unternehmen Weiss Ⅱ에서도 크로아티아 공군의 출격횟수는 겨우 100회를 웃도는 수준이었다.

1943년 3월, NDH는 독일로부터 또 한무더기의 비행기들을 전달 받았는데, 이번에는 30기의 Do 17E였다. 비록 대전 초반에 쓰인 낙후된 기종이었지만, 크로아티아 공군으로서는 이마저도 고마운 것이었다.

5월이 되자, 또 한번 파르티잔 소탕을 위한 대규모 작전이 감행되었다. Unternehmen Schwarz(작전명 Black)은 약 20,000명에 달하는 공산주의 파르티잔들을 섬멸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번에도 독일, 이탈리아, 크로아티아 공군기들이 5개의 비행장에 나누어 배치되어 소탕 작전을 지원하였다. 폭격기들이 날아올라 티토의 파르티잔 병력이 주둔한 곳에 폭탄을 투하하고 기총소사를 가하였다. 결과는 꽤 성공적이었지만 끝내 티토를 잡는데에는 실패하였다. 티토는 약 3,000여명의 잔여병력을 이끌고 포위망을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파르티잔의 크로아티아군 비행장 급습말고 하늘에서는 위험부담 없이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던 크로아티아공군에게도 새로운 걱정거리가 생겼다. 1943년 중반부터 발칸 반도 상공위에서 연합군 공군기들의 활동이 현저히 늘어난 것이었다. 이러한 위협을 알아차린 크로아티아공군은 독일에 최소한 2개의 Bf 109를 장비한 전투기 전대를 창설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정작 7월 크로아티아에 전달된 기체는 Bf 109가 아닌 프랑스 공군이 쓰던 Morane-Saulnier MS.406 36기였다. 12월달에 10기가 더 전달되고, 숫적으로 충분한 기체 대수는 새로운 전투비행대(제 11 그룹)를 결성 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긴 했지만, 이런 구식 전투기로는 점점 위험해지는 발칸반도 상공의 안전을 책임질 수 없었다.

이러는 와중에 8월에는 파르티잔의 '깜짝' 기습으로 17대나 되는 각종 군용기를 파괴시키고, 17대나 되는 기체를 손상시켰다. 이는 그 당시 크로아티아내의 파르티잔 세력이 친 독일 크로아티아 정부에 얼마나 위협적인 것이었는지를 알 게 해주는 예라고 할 수 있겠다.

[ 한 크로아티아 조종사가 Fiat G.50 날개위에 앉아있다. 엔진 카울링의 건물은 시삭 마을의 상징이라고 한다. ]

1943년 9월 초, 이탈리아가 항복을 선언하고 추축 동맹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때까지 크로아티아의 일부분을 경비하고 있던 이탈리아군이 모두 철수하게 되었고, 크로아티아공군은 이탈리아공군이 버리고 간 전투기들을 노획하여 손실의 일부분을 메울 수 있게 되었다. 9월 1일, 크로아티아 공군은 총 225대의 기체를 보유하고 있었고, 그중 작전 가능한 기체는 177대였다고 한다.

한달 뒤, 크로아티아 외교부는 비밀리에 미국 외교사절과 접촉하여 조약을 하나 맺게 된는데, 크로아티아공군이 크로아티아 영공의 연합군 공군기를 공격하지 않는 대신에 연합군은 어떠한 폭탄도 크로아티아 영토에 떨어뜨리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정말 미국이 이러한 조약 결의를 했는지는 의문이다. 한줌밖에 되지 않는 크로아티아 공군이 설령 폭격에 대응해 요격을 나선다고 해도 숫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미영 공군의 세력에 흠집이라도 낼 수 있을리가 만무한 상황에서 굳이 연합군 공군이 크로아티아 공군을 신경쓸 이유는 없었다. 또한, 크로아티아 영공을 지나던 연합군 전투기들이 때때로 크로아티아공군기에 기총 사격을 가했다는 사실은 이러한 조약의 존재를 의심스럽게 하는 것이었다. 1943년 한해 동안 61기의 기체를 잃었고, 그중 5대가 조종사와 함께 도주한 기체였다.

[ 한 크로아티아 조종사가 그의 Rogožarski R.100 앞에서 자랑스러운 듯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크로아티아공군은 이러한 파라솔 단엽기를 지상공격에 이용하였다. ]

1943년 말, 크로아티아의 군사력은 하향선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크로아티아 주재 전권대사였던 독일군 장군은 그의 12월 31일자 보고서에서 크로아티아군을 언급하였다.

전락... 반면에, 독일 군지휘관들이 크로아티아군과 협력하면서 그렸던 그림은 꿈같은 것이었다. 엄격한 군대규율과 전투 정신의 결여, 잦은 탈주와 반역, 적과의 내통과 심지어 군 장교의 인솔에 의한 부대 전체의 탈영은 날이 갈수록 늘어났고, 이러한 불미한 사건들은 그나마크로아티아군이 이루어왔던 군사적 성과를 퇴색시키는데 충분했다.

중략... 크로아티아공군의 문제를 말하자면, 육군의 상황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유능한 공군 장교들이 분명히 있고, 자국의 비행학교에서 양성되고 있었지만, 정작 이들이 임명받은 곳은 주요 전선의 비행대 지휘관 직이 아닌, 자국의 여러 민족주의 조직의 요직이었다.

크로아티아 방면의 독일군 사령관들은 대부분 독일군 지휘하의 독일-크로아티아인이 혼합된 부대로 크로아티아군을 개편하는 것이 전투력향상에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이러한 논의는 공군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었고, 12월 말에 크로아티아 루프트바펜 군단(Croat Luftwaffen-Legion)은 더 강화되었다. 물론 그전에도 독일공군 소속의 크로아티아 부대가 활동을 했고, 이번에는 2개의 폭격기전대가 KG3과 KG53에 소속되어, 동부전선이 아닌 크로아티아 본국에 배치되었다.

이 두 개 전대는 Fiat BR.20과 Cant Z.1007 폭격기를 훈련용으로 전달받아 운영하였고, 1944년 4월에는 Do 17기들과 몇대의 Ju 87B-2 슈투카를 받아 지상공격에 사용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앞서 언급한 기체들을 전달받기 전까지 이 2개 전대가 보유한 가용기체는 단 5대였다. 슈투카를 받고나서야 이렇다할 성과를 올리기 시작한 이 비행대들은 크로아티아공군 제 1 전투기 전대와 협력하여 잠깐 동프러시아에서 활약하였지만, 1944년 말에 해체되고 만다. 43년에 만들어진 크로아티아 근거리 지원 전대는 발칸반도에서 한때 독일의 근접 지원 항공기였던 Hs 126 헨쉘 복엽기를 사용하여 종전까지 활약하기도 하였다.

[ Cant Z.1007(위)와 Fiat BR.20(아래) 둘다 1935~6년에 나온 기체들로 이탈리아가 2차대전에 뛰어들었을 때에는 이미 노후한 기체였다. 크로아티아 공군은 몇몇 기체들을 전달받아 훈련용으로 사용하였다. ]

1944년 초, 연합군 공군은 목표물에 비교적 정확한 타격을 가하며 철도나 도로, 추축군 비행장, 항구시설에 적잖은 피해를 주었다. 또한 파르티잔에 대한 물자 공수에도 박차를 가하였다. 한번은 미공군 폭격기들이 자그레브 비행장을 공격하여 12기의 크로아티아 전투기들을 파괴시켰다. 숫자상으로 그리 커보이지는 않지만, 파괴된 이 12대의 전투기들은 어제까지만 해도 크로아티아 방공력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들이었고, 이러한 손실이 아니더라도 가용기체가 절망적으로 부족했었던 크로아티아 공군은 땅을 치는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절체절명의 크로아티아 공군을 구한 것은 독일이 전달한 많은수의 이탈리아제 전투기 마키 MC.202 폴고레와 MC.205 벨트로였다. 또, 운반도중에 15대중 5대가 파괴되기는 했지만, 무사히 크로아티아에 도착한 독일 Bf 109G-10, G-14기들에 의해 크로아티아공군은 한숨을 돌리는 듯했다. 하지만 지상의 상황은 너무나도 빠르게 벼랑 끝으로 치닫고 있었고, 한줌밖에 되지 않는 메서슈미트기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 크로아티아 공군의 Bf 109G, 독일공군의 것을 약간 변경한 동체의 마킹과 수직미익의 국적마킹이 특징적이다. ]

이미 44년 9월에, 강력한 파르티잔 부대가 바냐루카의 방어진지를 돌파했고, 주변에 있던 비행장도 점령되면서 11기의 크로아티아공군 기체를 노획하는 성과를 올렸다. 아직 사실이었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 당시 독일은 겨우 8기의 Fi 167 복엽기를 전달함으로써 크로아티아의 급박한 항공기 지원요청을 잠재우려고 했다고 한다. 원래 Fi 167기는 독일이 만들고 있었던 항공모함 '그라프 제펠린'에 탑재될 뇌격기였으나, 항모 프로젝트가 한창 진행되던 42년 Ju87C에의해 함재기 자리를 빼앗기게 되었고 네덜란드 해안가에 9기가 배치되어 정찰 임무를 맡게된 비운의 기체였다. 여하튼 아무리 크로아티아 조종사들이 대전중에 별의별 구닥다리 기체를 운용하면서 싸워왔다지만, 대량양산도 되지 않은 샘플기체라고 할 수 있는 기체들을 보낸 처사는 너무 했다고 할 수 있겠다.

1944년 말, 지상의 상황이 이렇듯 긴박하게 돌아가고, 파르티잔에게 잡힌다면 처형말고는 더 이상의 좋은 대우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조종사들은 결국 비행기를 몰고 탈주를 하기 시작하였다. 종전 1달전, 30여명의 크로아티아공군 조종사, 승무원들이 각기 기체들을 몰고 파르티잔에 투항하였다. 하지만 비교적 뒤늦게(?) 투항한 이들이 과연 티토의 승리와 함께 일어난 대학살에서 살아남았을지는 의문이다. 티토의 파르티잔 부대에 의해 자행된 대량학살은 숫자로 보나 그 잔학성으로보나 다른 어떤 유럽의 연합국들이 저지른 학살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오늘까지도 크로아티아 공군에 몸담았던 조종사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추측만이 무성할 뿐이다. 그저 크로아티아 공군의 몇몇 수뇌들과, 앞서 말했던 Džal 그룹의 비행대장 Franjo Džal과 같은 주요 지휘관들이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처형되거나 그대로 즉결 처형되었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크로아티아 출신 에이스

격추수

비고

 소령 Mato Dukovač

 대위 Cvitan Galič

 소위 Dragutin Ivanič

 중위 Ivan Jergovic

 특무상사 Josip Jelačič

 중위 Ljudevit Bencetič

 소위 Stepan Boškič

 대령 Franjo Džal

 대위 Zlatko Stipčič

 소위 Zivko Džal

 특무상사 Stjepan Marinasevič

 소령 Mato Culinovič

 대위 Vladimir Ferenčina

40

38

18

16

16

15

13

13

12

12

11

10

10

1944년 9월 소련으로 도주

1944년 6월 전사

 

종전후 공산주의자에 의해 처형

 

 

 

종전후 공산주의자에 의해 처형

종전후 공산주의자에 의해 처형

포로수용소에서 공산주의자에 의해 처형

 

지상공격중 격추, 전사

 

마치면서...

이제 2007년 한 해도 다 지나가는군요... 저는 대학교 1학년을 보내면서 하고싶었던 일들이 아주 많았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반도 못해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불타는 하늘에 글을 올리고 비록 졸작도 많았지만 제글이 쌓여가는 것을 보니 그래도 1년을 허송세월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네요. 전공영어나 교육학 공부는 임용 준비기에 해도 된다는 자기 합리(ㅡㅡ;)로 자신을 변호하면서 아무래도 제가 관심이 있는 밀리터리 관련 쪽을 공부하면서 또 영어공부를 하게 되었군요. 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공부도 되니 정말 좋은 공부 방법이 아닐까 자신있게(?) 말해 봅니다.

번역이라는 것은 꼭 영어전공자들만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중에 영어에 대한 관심이 많으신분이 있다면 한번쯤 도전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군요. 번역이란 것이 꼭 고등학교 때 배웠던 부조리극 '원고지'에 나오는 교수가 하는 일처럼 기계적이고 고리타분한 작업은 아닙니다. 번역은 제 2의 창작입니다. 해보시면 늘어나는 어휘실력 말고도 무언가 번역이라는 것이 가져다주는 열매를 맛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사설이 길었군요. 저는 2월 25일 입영할 예정입니다. 그나마 카투사라서 글을 아예 쓰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니 다행이군요.

그럼 불타는하늘 가족여러분 한해 잘 마무리 하시길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