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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awasaki Ki-44 ◇ This document was updated at 2009. 8. 26 이번의 GWP 업데이트는 태형양전쟁 후반기 일본 육군항공대의 신예기로 선보였던 Ki-44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 Ki-44 리뷰는 최근 활발하게 전투기 리뷰를 보내주시는 불타는하늘 네이버 카페의 루닉님의 기고로 업데이트 되었습니다. (보내주신지 1주일이 다 되어서야 업데이트 하게 되네요.) 계속 마이너 아이템에 대해서 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자세한 내용을 불타는 하늘에 제공해주시는 루닉님께 감사드립니다.
*육군이 원한 중전투기 아시아인끼리의 전투에서, 일본 육군 항공대는 여러 번의 전투로 입증된 자신들의 기술에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높은 기동성을 갖춘 전투기와 결합된 조종사들의 격투전 능력은 공중전에서의 승리에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허나 일본 군대가 제국의 팽창을 위해 섬 밖으로 나가 본토의 수백, 수천 마일 밖에서 전쟁을 벌이면서, 일본 자신도 주변의 국가들에게 위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점점 깨닫게 되었다. 멀리 떨어진 비행장들부터 심지어는 본토의 궁성까지 적 폭격기의 목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일본 육군에는 새로운 종류의 전투기가 필요했다. 급히 상승하여 적의 폭격기가 목표 상공에 다다르기 전에 그들을 포착, 화력을 집중하여 격추시키는 단일 목적을 위한 전투기는 이전의 일본 육군 항공대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만주국 지역에서는 소련군이 이미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고, 이로 인해 상황은 더욱 각박해졌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일본까지는 폭격기로 불과 네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으며, 기술이 발달할수록 폭격기는 더욱 빨리 도착할 수 있었다.
*두 마리 토끼를 쫓다 육군이 나까지마 사에 97식 전투기 (Ki-27)를 대체할 Ki-43 전투기를 발주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공중 방어 전투기에 대한 초안이 보내졌다. 나까지마 사는 동시에 두 개의 전투기 설계안을 떠안게 되었지만, 이전의 경합 체제에서 벗어나 단독 발주를 받은 것만으로도 나까지마 측에는 좋은 사업이 되는 것이었다. Ki-27을 설계했던 히데오 이토카와 박사가 Ki-43을 다시 맡는 동안 코야마 테이 박사가 이 공중 방어 전투기를 맡았다. 코야마 박사가 맨 먼저 시작했던 일은 고속 성능과 상승력을 만족시키기 위한 대출력 엔진 선택이었다. 그는 950마력짜리 나까지마 Ha-25 (하야부사와 영전에 장비된, 바로 그 사까에 엔진이다.)엔진 대신, 중폭격기를 위해 개발되었던 1,250마력의 나까지마 Ha-41 엔진을 채택하였다. Ki-49 폭격기를 설계했었던 코야마는 이 엔진이 중폭격기를 날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중폭격기를 잡는 데도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매우 작은 주익과 플랩. 공중전 플랩은 기동성을 보완하려는 시도였다.] 새로운 Ha.41 엔진은 덩치가 컸으며, 높은 조종석을 가진 대형 기체에 달지 않는 이상 이 엔진은 조종사의 시계를 크게 방해할 것이었다. 그러나 코야마 박사는 조종석 시계를 손해보는 대신 항공기의 무게를 최대한 줄이는 편을 선택하였다. 기존의 Ki-27과 Ki-43보다 작은 기체와, 뒤로 쭉 빠진 수직미익이 특징인 동체는 사격 중에 항공기가 안정되게 해 주었고, Ki-43을 위해 만들어진 나비 형태의 공중전 플랩도 도입하여 가능한 한 최대의 기동성을 유지하려 하였다.
*해군에게 당한 망신 1940년의 늦여름, 네 대의 Ki-44가 처음 선보였다. 육군 관계자들은 '훌륭하나, 과연 이것이 날 수 있을까?' 등의 약간 흉보는 듯한 질문을 던졌으나, Ki-44는 잘 날아 올랐다. 마침 영국의 하늘은 불타오르고 있었으며, 영국 전투기 조종사들이 하인켈과 도르니에를 상대하며 얻은 교훈들은 이 무겁고 다루기 어려운 새 전투기에 그대로 녹아들었다.
[1940년 8월 출고된 Ki-44의 첫 시험기.] 자신, 그리고 약간은 자만에 찬 육군은 이 항공기를 41년 1월의 연례 행사에 내보내고 싶어했다. 하지만 해군이 가진 A6M2 제로 전투기에 비해 Ki-44 실험기들은 여러 가지에서 열세였다. 무장을 실은 상태에서 최대속도는 겨우 550km/h였으며, 5,000미터 상공으로 상승하는 데 5분 54초씩이나 걸렸고, 더 큰 문제는 A6M2가 이런 면에서 대부분 Ki-44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Ha-41 엔진의 거대한 크기, 그리고 그 카울링 때문이었다. 따라서 나까지마 측에서는 이 부분을 새롭게 손보아야 했다. 이 때문에 실전 투입은 늦어졌지만 연례 행사마저 늦출 수는 없었다. 결국 행사에서 육군 측은 코가 납작해지고 말았다. 비록 Ki-44가 상승력이 약간 좋았지만, 같은 고도에서 A6M2보다 그리 빠르지도 못했으며, 더구나 그 A6M2는 Ki-44가 처음에 포기했던 그 약한 사까에 엔진을 달면서도 육중한 기관포를 2문이나 달고 있었던 것이다.
*굴욕을 딛고
[이중반전 프로펠러를 장비한 Ki-44 실험기. 실용화되지는 않았다.] 망신을 당한 이후 육군은 여러 개조와 실험, 그리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시도하였다. 최종적으로 비무장 실험기가 626km/h의 속도를 기록하였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어떤 무장도 싣지 않은 경우였다. 이 결과에 만족한 육군은 해군이 영전 11형을 테스트한 것과 같이 Ki-44들을 급히 실전에 투입하려 하였다.
[1941년 9월 Ki-44를 수령하는 '물총새' 중대.] 1941년 6월 새로운 Ki-44의 첫 번째 기체가 출고됨과 동시에, 열 대의 초도양산형 Ki-44가 9월까지 완성되었다. 9월 15일에는 중국과 노몬한 상공에서 경력을 쌓은 조종사들이 후사 기지에서 훈련을 시작하여, 제 47 '물총새' 중대를 이루었다. 말라야 지방에서 영국 공군의 버팔로를 첫 제물로 삼은 Ki-44는 1942년 1월 28일에 2식 단좌 전투기 '쇼키' (괴물잡이 정도의 뜻이 된다) 로 정식 채용되었다.
[Ho-103. 미군 브라우닝 M2를 역설계하면서 이전 일본육군이 소량을 도입해서 사용하던 이탈리아산 Breda-SAFAT의 12.7mm*81 탄환을 적용한 경량 중기관총으로, 일본 육군은 이를 '기관포'로써 중전투기의 기본 무장으로 도입하였다. 이탈리아와 일본육군은 특이하게 12.7mm 구경의 작열탄을 개발하였다.] 기존에 생산되어 있던 7.7mm 2정과 12.7mm 2정으로 무장한 2식전들은 1형 갑으로 분류되었고, 실전을 겪은 조종사들의 의견을 반영한 1형 을은 4정의 12.7mm를 장비했으며, 강착장치 격납부의 문제를 약간 손본 1형 병이 본격적으로 양산되었다.
*괴물잡이, 밥값을 하기 시작하다 [착륙하는 2식전. 착륙속도가 매우 빨라 조종사들을 애먹였다.] 비록 어느 정도 적당한 성능에 이르렀다고 하지만, 일선 조종사들의 혹평은 너무 가혹했다. 육군 조종사들은 이 비행기의 너무 빠른 착륙속도와 기동성의 부족을 문제삼고 있었다. 물론 노련한 조종사들은 문제가 없었지만 미숙한 조종사들에게는 치명적인 문제였다.
[노획한 영국군의 버팔로와 모의 공중전을 벌이는 2식전.] 1942년 여름에는 가와사끼 기푸 공장 근처의 카가미가하라에서 2식전과 독일에서 선물받은 Bf109 E-2, 그리고 미국의 P-40E 세 기종간의 비교가 있었고, 이 비교에서는 2식전이 나머지 두 기종들을 압도할 수 있었다. 물론 가와사끼사가 개발하고 있던 Ki-61 시험기가 2식전이나 1식전 2형을 모두 압도하고 있었지만, 2식전은 아직까지 전술적, 기술적으로 모든 것이 완벽하지 않은 상태였다.
[2식전 2형과 100식 중폭 2형의 심장, Ha-109.] 100식 중폭격기(Ki-49 돈류 'Helen')를 개발하던 코야마 박사의 경력이 여기서도 발휘되어, 쇼키는 또 한 번의 큰 변화를 겪게 되었고, 1941년 6월 만들어진 1,520마력짜리 Ha-109 엔진이 그 열쇠가 되었다. Ha-109는 기존의 Ha-41과 크기가 같았기 때문에, 2식전의 기체에 별다른 변화를 줄 필요 없이 새로운 엔진을 장비할 수 있었다.
[Ha-109는 최대이륙중량 3톤에 육박하는 2식전 2형을 당시 일본육군에서 중량대 마력비가 가장 높은 기체로 만들었다.] 따라서 Ha-41은 단종되었고, 격납식 꼬리 바퀴 등의 사소한 변화와 함께 3대의 2형 갑 시험기를 거쳐 그 해 10월부터 2형 을이 대량 양산되어 1000여 기가 생산되어 2식전 생산대수의 대다수를 차지하였다.
[아케노 비행학교에서 교육과정을 수료한 2식전 조종사들.] 운용 가능한 2식전의 수가 점차 늘었고, 아케노 육군 항공학교에서 훈련받은 조종사들이 중국과 버마, 만주국, 대만, 그리고 일본 본토의 비행부대에서 2식전을 지급받게 되었다. 1943년 가을에 들어 연합군 조종사들은 이 새로운 일본 전투기를 처음 목격하였고, 태평양 지역의 전쟁이 시작되고 난 후 최초로 배치된 새로운 전투기로써, 일본 수상의 이름을 딴 '토죠'라는 식별 코드를 붙였다.
*전선의 붕괴를 마주하다 '해 뜨는 나라' 일본 제국에 점점 망조가 찾아들기 시작했던 1943년, 다른 모든 항공부대들과 같이 쇼키를 장비한 부대에도 팽팽한 긴장감이 조성되고 있었다. 이제 연합군 폭격기들과 항공모함 부대들이 수마트라의 유전을 공격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만주국에 주둔하던 87연대는 제 3 항공군에 편입되어, 정유시설 40마일 밖에 있는 팔렘방의 비행장에 주둔하게 되었다. (이 비행장은 원래 네덜란드 인들이 건설해 놓았던 것이었다.)
[버마 상공을 편대비행하는 2식전들]
그 다음해 1월 4일, 영국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헬켓, 콜세어 전투기와 어벤져 폭격기가 북쪽에서 내려와 유전을 공격했다. 24일에 다시 출몰한 이 공격부대는 아침 초계비행을 피하여 팔렘방에 당도했다. 지상에 주기해 있던 87연대의 쇼키들은 사납게 총탄을 퍼부어대는 콜세어들에게 큰 피해를 입었다. 백여 대의 전투기와 폭격기들이 두 파로 나뉘어 정유시설을 공격했으며, 하야부사, 토류, 그리고 살아남은 쇼키들이 날아올라 최대한 피해를 줄이려 하였다. 특히 이 전투에서 이나야마 히데아끼는 검은색의 2식전 2형 을을 몰고 어벤져 두 기를 격추하였으나, 이 공중전에서도 일본 육군은 패배를 맛보았고, 87연대는 12기의 쇼키와 7명의 파일럿을 손실하였다. 전선이 축소되고 팔렘방도 육상기들의 공격 범위에 들어오자, 육군항공대는 1944년 말 후퇴하였고, 87연대는 일본 본토방어 목적으로 재배치되었다. [1943년 중국 중부지방에서 작전중인 85연대의 2식전.] 중국 전선에서는 쇼키가 나름 활약하여, 꽤 쓸 만한 전투기로 꼽혔다. 2식전을 운용했던 9연대와 85연대는 난징 기지를 방어했으며, 광둥 지역도 85연대의 방어 지역에 있었다. 중국의 2식전들은 통킹 만의 하이난(해남) 섬을 포함한 중원의 가운데와 남부를 포함한 지역을 방어하고 있었다. 필리핀 방어에 많은 수가 차출되었지만, 전쟁이 끝날 때까지 몇몇 2식전 부대는 중국에서 센놀트 장군의 라이트닝, 머스탱, 썬더볼트와 대치하고 있었다. 수는 적었지만 이 2식전 조종사들은 실력이 높았으며 껄끄러운 상대였다. 특히 격투전 위주의 전법을 지닌 일본군에서, 2식전은 매우 골치아픈 항공기였고 따라서 조종사의 기량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리고 살아남은 조종사들은 이 비행기를 다루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1944년 초까지는 미 14공군의 P-38과 P-40E들은 2식전에 대해 큰 우세를 점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2식전보다 빠르고 기동성도 우수한 P-51B가 배치되자 육군항공대의 우세는 끝이 났다. 그리고 이것은 곧 중국 전선의 육군항공대에게는 사형 선고였다. 1944년 말 중국, 인도차이나, 대만 전역에서 일본군은 총 783대의 전투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1945년 3월 그 수는 682대로 떨어졌고, 6월에는 고작 340대만이 남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연합군의 공군력은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우월해졌으며, 광둥의 85연대는 조선으로 철수했다.
[필리핀에서 작전하던 22연대의 2식전. 증조 2개를 동체 가까운 쪽에 장비했다.] 일본군의 여러 중무장 전투기들이 본래의 임무인 폭격기 요격을 위하여 필리핀에 계속 보내졌고, 44년 10월 연합군이 레이테 만에 침공해 오자 2식전을 장비한 29연대와 246연대가 루존 섬에 파견되었다. 9월부터 필리핀에서 작전하던 22연대는 24기 이상의 대편대로 초계비행하면서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연합군 전투기와 맞서 싸웠다. 일본군이 지속적으로 요충지를 잃어 가며 패퇴하는 만큼 연합군의 함재기와 육상기들이 거세게 달려들었고, 40mm를 장비한 22연대의 2식전들과 다른 일본기들은 조금도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허망하게 격추되었으며, 더 많은 수가 지상에서 격파당했다. 마침내 다음해 1월 9일 링가옌 만에 연합군이 상륙하자 필리핀 지방에서의 작전은 끝이 났다.
*외롭고 묵묵한 방어자 [필리핀에서 노획된 22연대의 2식전] 필리핀이 일본의 영향에서 벗어난 후, 2월 14일에 클락 비행장을 점검하던 미군은 40mm를 장비한 온전한 2식전 한 대를 접수했다. 연합군은 일본에 투입될 폭격기들이 어떤 상대를 만나게 될지를 어렴풋이 파악할 수 있었다.
[40mm Ho-301과 그 탄환. 로켓과 비슷한 무탄피 탄약을 사용하는 특이한 기관포로 구경에 비해 매우 가벼웠지만, 포구속도가 매우 낮고, 최대 사정거리가 150m에 불과해 자살공격이나 다름없는 거리에서 사격해야 했다.] 본토 방어전이 벌어질 시점에서 2식전은 일선의 연합군기에 대해 열등한 성능을 보였지만, 무시할 수는 없는 상대였다. 1944년 말에는 2식전에도 기관포 무장이 부여되었다. 주익의 Ho-103 기관총을 Ho-3 기관포로 교체한 2형 정이 생산되었으며, 주익에 40mm Ho-301 기관포를 장착한 특이한 개수형(2형 정 개(改))도 생산되었다. [열악한 환경에서 B-29에 맞서던 2식전 조종사들, 주익에 보이는 육중한 포신이 Ho-301의 그것이다.] Ki-84에 밀려 단종되면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는 못했지만, 40mm 장착형의 주익 무장을 37mm Ho-203 기관포로 교체하는 등의 강화 계획도 있었다. 사실 1944년 9월 26일에 중국 동북 지방의 안산(鞍山)이 폭격을 받은 이후로, 일본군에게 있어 항공기의 일본화는 매우 심각한 과제였다. 당시 일본 본토의 앙과 동부를 방어하는 다섯 개의 항공 연대와 만주국 방면의 두 개의 연대는 모두 2식전을 장비하고 있었다. [후지산 상공의 B-29. 일본을 벌벌 떨게 만든 초공요새.] 지금까지 보아 왔던 B-17이나 B-24 따위는 2식전으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지만, B-29는 지금까지 보아 왔던 상대와는 격이 달랐다. 여러 대의 레이더에 연동된 방어 기총과 크고 튼튼한 설계는 5년 전에 설계된 전투기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웠다. [4식 전투기 Ki-84 하야테. 1식전과 2식전의 장점을 겸비한 만능 전투기로 개발되었다.] 따라서 2식전 조종사들에게는 별다른 선택이 없었다. 다른 작은 항공기들을 상대하거나, 저고도의 B-29를 몸으로 들이받는 것뿐이었다. 물론 2식전의 성능 향상을 위하여 엔진을 2000마력의 Ha-145(해군의 ‘호마레’ 엔진. 일본 육군과 해군은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도 서로 대립했다.)로 교체하고 주익의 크기를 늘린 3형을 개발하고 있었다.
[수리를 받는 2식전. 그들에게 상황은 특히 어려웠다.] 그러나 새로운 4식 전투기, Ki-84 하야테가 등장하자 2식전은 단종되었고, 더더욱 일본 육군에 있어서 별로 아깝지 않은 전력으로 전락하였다. 심지어는 대전 후반의 공냉식 엔진 기종들에 흔히 베풀어지던 추력식 배기관 등의 간단한 개수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리마쓰 기지의 독립 47중대] 잔존한 2식전 운용 부대 중에는 이전의 '물총새' 중대를 전신으로 하는 독립된 제 47 전투기 중대가 있었다. 도쿄 방어를 위해 말라야에서 돌아온 이 중대는 자원자들을 바탕으로 폭격기에 들이받는 전법을 택했다. 도쿄 외곽의 나리마쓰 기지에서 이들은 1944년 11월에 특공(자살공격)을 위한 신텐 비행대를 이루었고, 다른 2식전 운용부대들도 본토 방어를 위해 저마다 돌아왔다.
[2식전과 함께한 신텐 비행대의 조종사들. B-29를 들이받는 전법을 썼다.] 1945년 2월이 되자 연합군의 함상기들이 일본 본토에 이르렀으며, 4월이 되자 P-51의 호위를 받는 B-29들이 저공으로 날아와 폭탄을 퍼부었다. 일본의 모든 전투기들과 같이 2식전도 전투에 참가했다. 5월부터 오키나와에서 온 연합군기들이 본토를 두들겼고, 7월 10일부터 종전일까지 영국과 미국의 항공모함 부대는 일본의 공군기지에 아홉 번에 걸친 대공습을 감행하였다. 이 상황에서 불과 세 개의 항공연대만이 '토죠'를 몰고 있었지만, 그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날아올랐다.
*종언
[1944년 말, 후지산 주변을 비행하는 2식전] 일단 한 번 감을 잡게 되면, 쇼키의 조종사들은 모두 자신의 애기에 빠져들었다. 작고 빠르며 튼튼한 2식전은 다른 육군 전투기들과는 전혀 다른 위력을 가질 수 있었다. 비교적 든든한 장갑과 튼튼한 연료 탱크는 치고 빠지는 전술을 쓰는 조종사들에게 자신감을 주었다. 쇼키는 다른 전투기들에 비해 조종사가 살아남을 기회를 많이 주었고, 다른 전투기에 비하면 미미하지만, 쇼키로 여러 번의 승리를 거둔 뛰어난 조종사들도 존재했다.
[남겨진 2식전들은 제국주의 대신 이념에 따라 싸웠다.] 이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매우 특이한 존재였던 2식 전투기는 시험기를 합쳐 총 1225기가 생산되었으며, 태평양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일부 잔존기는 국공 내전에서 사용되었다.
* Ki-44 일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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